한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표정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아이들’이라고 부르던 얼굴들
나는 그들의 공간에 머물고, 현지에서 오랫동안 선교해 온 수녀님과 아이들 사이에 놓인 관계를 보았다. 나도 한 아이가 내밀어 준 손을 통해 관계의 첫발을 내디뎠다. 또한 그들과 웃음을 나누었고, 공동체가 함께 삶의 터전을 일구는 자리에도 함께 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그들을 ‘에티오피아 사람들’이나 ‘아이들’이라는 집단적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집단적 시선을 거두고, 서로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디를 가든 처음에는 사람들을 집단으로 바라보게 된다. 에티오피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공간을 채운 사람들, 웃으며 달려오는 아이들,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보았다. 나는 그들을 자연스럽게 ‘사람들’이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수많은 아이 가운데 한 소년이 나에게 손을 내 밀어 준 순간, 나에게 관계가 열렸듯이 우리의 관계도 단체가 아닌 개인에게서 시작되어야 했다.
모두가 모인 넓은 공간에서 한 소년이 몸을 돌려 나를 바라보는 순간, 나에게 익숙한 복수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아이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저마다 다른 표정과 기억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난 한 아이의 손을 기억하면서도 여전히 여러 사람을 한꺼번에 바라보는 집단적 시선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얼굴이 돌아보았다.
오라토리오(Oratorio) 시간에 참석하였다. 오라토리오는 아이들이 놀러 왔다가 친구를 만나고, 친구를 만나러 왔다가 배움을 얻으며,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하느님과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하도록 돕는 살레시오의 교육 공동체를 말한다. 이 시간에는 봉사자들과 인사를 나누는 순서도 있었다.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근처에 사는 것이 아니라 몇 시간을 걸어서 와야 하는 친구들도 꽤 있었다. 아이들이 다 모이는 데까지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남자아이들, 여자 아이들, 유치원생에서 초등학생,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까지 정말 많이 모였다.
강당을 가득 채운 아이들 가운데 한 소년이 갑자기 나를 돌아보았다. 소년은 왜 돌아보았던 것일까? 묻지도 못할 만큼 찰나의 순간이었고, 그 순간 묻기보다는 셔터를 먼저 눌렀다. 그 눈빛이 무엇을 묻고 있었는지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한다. 내가 많은 아이를 바라보는 동안, 이 소년은 카메라를 든 나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낯선 외국인이라 신기한 궁금해서 바라본 것일까? 카메라로 자신들의 모습을 찍고 있어서 그랬던 것일까? 경계 가득한 눈 빛일까? 사실 돌아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소년이 나를 돌아본 뒤로 나에게 강당은 더 이상 하나의 덩어리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사실 오라토리오 시간도 나는 '보는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것은 내가 프레임을 정하고, 누구를 담을지 고르고, 언제 누를지 결정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다른 봉사자들에 비하면 편안하다.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년이 몸을 돌린 순간 그 편안함이 사라졌다. 나를 향한 그 눈빛 앞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다. 나는 왜 보기만 하고 있는가? 나는 많은 사람을 하나의 집단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소년이 그렇게 물은 것이 아니다. 그 얼굴 앞에서 내 양심이 흔들렸을 뿐이다. 집단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여기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다시 떠올렸다. 한 사람의 진솔한 얼굴을 마주하게 될 때 나도 봉사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온전한 한 개인으로 서 있을 수 있다.
얼굴과 마주하다.
나는 밝은 미소를 가진 소녀와 눈과 눈을 마주하였다. 말이 서로 안 통하는 것도 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던 것 같다. 솔직히 말이 통한다고 해서 달라졌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몇 마디를 나누고 이름과 나이와 사는 곳을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이 소녀를 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많이 안다고 착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이곳에서 옷과 표정으로 성격이나 생활환경을 추측하고 짐작하곤 하였다. 이 소녀의 아름다운 미소만 보고 그 삶을 단정하기도 하였다. 실제 삶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사람을 처음 만나면 피상적으로 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적어도 시선을 마주한 순간만큼은 삶을 가진 한 사람에 대한 진지한 마주 봄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래서 나의 교만함을 점검하는 물음을 던졌다. 진지한 마주 봄의 자세는 무엇일까?
사실 나도 잘 모른다. 사진을 보며 다시 생각해 보았다. 우선 사진을 있는 그대로 보면 소녀만 선명하게 남기고 나머지 배경이 흐려진 것을 알 수 있다. 그 흐려진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마주 본다는 것은 그 흐려진 자리를 없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 일이 아닐까? 가까이 보이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지 않아야 하는 자세 말이다. 배경이 흐려지고 한 얼굴만 남았지만, 가까이 보인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이해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녀의 얼굴에 머물던 내 시선은 강당 안에서 나를 향해 웃고 있는 또 다른 아이에게로 옮겨갔다. 웃음은 친근했지만, 그 의미까지 분명한 것은 아니었다.
웃는 얼굴도 다 설명되지는 않았다.
이 소녀는 나를 왜 바라보았을까? 마찬가지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 아이의 미소는 정말 환하고 예뻤다. 우리 봉사자들을 보고 반갑게 웃어준 것 같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래서 이 소녀의 미소는 나의 마음을 녹였다. 한 소녀가 웃었을 뿐인데, 나의 기분이 좋아지는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얼굴 말고는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도, 오늘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미소 하나가 나를 기분 좋게 만든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아는 것이 없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이때 나는 그 좋은 기분을 그대로 이 아이의 것으로 여겼다. 내 마음이 편해졌으니 이 아이도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자연스레 커지며 말해주지도 않았는데, 나 혼자 소녀의 현실을 가공해 버리고 말았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는 이 아이는 열악하고 부족한 환경에서 살지만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저 순수함이 가난을 이겨냈을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이렇게 현실이 아닌 가공된 이야기가 하나 만들어졌다. 내가 사진을 찍었을 때는 이 아이가 보여준 순간의 표정이 너무 예쁘고, 빛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내가 남기고 싶은 순간을 가공하고 있었다.
이 아이가 왜 웃었는지 나는 모른다. 봉사자들을 보고 반갑게 웃어준 것 같다는 생각도 내 생각이지 확인한 것은 아니다. 웃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본 것은 그 짧은 순간이다. 내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은 분명하다. 웃음도 슬픔만큼 복잡한 삶의 한순간이다. 한 사람의 표정만으로 삶을 온전히 알 수 없다.
한 얼굴 뒤에는 또 다른 삶이 있었다.
다른 사진 속 이야기가 한 사람의 얼굴과 표정에 집중했다면, 다음 사진을 통해 얼굴 뒤에 놓인 관계를 보게 되었다. 아이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습. 업고 있는 아이의 표정에는 귀찮음이나 슬픔, 후회가 보이지 않았다. 이 아이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나는 아이가 아이를 업은 장면 앞에서 자연스레 한국전쟁 후의 열악했던 우리 슬롯의 단면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했다. 분명 언니가 자신의 삶을 희생하며 육아의 부담을 지고 있다. 더군다나 사진 밖의 일도 어렵지 않게 상상했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실 것이고, 육아를 큰 아이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사진 속 표정을 보면 이 소녀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것이 이 가족을 지탱하는 힘일지 모르겠다. 부모가 육아를 소홀히 하는 게 아니라 삶을 위한 각자의 역할이 분명하고, 그 역할을 바카라임감 있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나의 짐작도 사실 추측이었다. 어쩌면 이런 추측도 현실을 가공하는 잘못일 수 있다. 확인한 적도 없으면서 나는 두 아이를 자매라고 불렀고, 부모의 형편을 정했다. 사진에 있는 것은 한 아이가 더 어린아이를 업고 서 있다는 사실뿐인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업힌 작은 소녀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작은 아이도 한 사람인데, 나는 업힌 모습만 보며 하나의 인격으로서 바라보지는 못했다. 그냥 단지 한 사람의 얼굴 뒤에는 사진에 담기지 않은 삶이 있다는 사실만 마음에 강하게 새겼다. 나의 말은 마지막으로 만난 한 소녀의 표정 앞에서는 더욱 작아졌다.
나는 이 얼굴을 한마디로 부를 수 없었다.
나는 이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이 아이의 환한 웃음을 먼저 보았다. 환한 미소와 함께 눈물 자국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난 이 아이가 눈물을 흘렸는지, 흘렸다면 왜 울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내 앞에서 그 누구보다 아름답고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한 사람의 얼굴은 분명 나를 바라보지만,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내게 허락하지는 않았다. 이 아이의 얼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함께 있었다.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타인의 얼굴에 드러나는 것이든, 숨어 있는 것이든 한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얼굴 앞에서는 그 마음이 조금 달라졌다. 이 아이의 얼굴에 나타난 슬픔과 기쁨을 다 설명해 내려고 애쓸 필요는 없었다. 다 알 수 없다는 사실 앞에 조용히 머물러도 괜찮았다. 어쩌면 모른다는 사실 앞에 그냥 조용히 머무는 것이 한 사람의 삶을 존중하는 일일지 모른다. 소녀의 얼굴에는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머물러 있었다. 그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성급한 설명을 멈추고 그 곁에 머무는 것이었다.
얼굴은 끝내 하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강당을 가득 채운 아이들이 보였다. 그러나 한 소년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본 뒤부터 '아이들'이라는 말은 충분하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만난 얼굴들은 모두 달랐다. 어떤 얼굴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고, 어떤 얼굴은 웃었으며, 어떤 얼굴은 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얼굴에는 내가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표정과 감정이 머물러 있었다.
나는 봉사를 하고 가식이 아닌 진심으로 다가가면 그 순간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굴을 가까이 마주할수록 알 수 없는 것이 더 많아졌다. 웃음이 삶 전체의 행복을 뜻하지 않았고, 눈가의 흔적이 반드시 슬픔만을 말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한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의 삶의 일부를 보여주었지만, 삶 전체를 내게 설명하지는 않았다.
얼굴을 마주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야기를 알아내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 아이들의 얼굴을 사진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 얼굴을 사진에 담은 뒤, 내게 남은 것은 설명이 아니라 바카라임이었다. 지금 그 얼굴들은 내가 가진 사진만이 아니라 내 마음에도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