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 승객의 안부

by선비천사

새벽 6시, 근처 나지막한 산길을 걷다 보면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노인, 묵직한 발걸음으로 등산로를 오르는 중년의 사내, 발밑을 밝히는 작은 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걷는 이들.


어떤 사람은 매일 비슷한 시간에 만난다. 이름도 모르면서 얼굴은 익숙하다. 하루 보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있나 싶다가, 며칠 뒤 다시 마주치면 괜히 마음이 반갑다. 인사라고 해봐야 어둠 속에서 나누는 짧은 목례나 "안녕하세요" 한마디뿐인데, 이상하게 그 소리가 새벽 산길에서는 오랫동안 다정하게 남는다. 가슴속에 어떤 무게를 짊어지고 사는지 알지 못해도, 그저 오늘 하루도 무탈하게 산에 올랐다는 사실 자체가 서로에게 안부가 되는 셈이다.


문득 이 정적 속의 산길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자그마한 행성의 축소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우리는 까닭도 모른 채 각자 다른 경로를 통해 이 푸른 별에 올라탔다. 누군가는 따뜻한 비단이불속에서 첫울음을 터뜨렸을 것이고, 누군가는 서글픈 가난의 그늘 밑에서 눈을 떴을 것이다.


시작점도, 손에 쥐어진 조건도 제각각이다 보니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한다. 저이가 쥔 것이 내 것보다 커 보일 때면 괜스레 조바심이 나고, 내가 조금 앞서나갈 때면 알 수 없는 우월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산에서도 사람 마음은 별수 없다. 뒤에서 서벅서벅 발소리가 다가오거나 앞사람이 나를 추월해 나가면 괜히 걸음이 빨라진다. 경쟁하러 온 것도 아닌데 다리는 슬그머니 승부를 건다. 정상에서 상장을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산 중간쯤 마른 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며 발밑을 내려다보면, 그 작은 속도 다툼이 참 싱겁게 느껴진다. 아등바등 올라온 길이나 이제 곧 내려갈 길이나 결국 같은 산자락에 걸쳐 있고, 산 아래 펼쳐진 도시의 불빛들은 멀리서 보면 그저 하나의 아련한 점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히 삶을 완벽히 통제하고 있다고 믿지만, 이 별에 올라탄 모든 승객에게 부여된 완벽하고 확실한 조건은 단 하나뿐이다.


그 누구도 살아 있는 채로 이 별에서 내릴 수는 없다.


산에서 내려오는 길, 맞은편에서 오르막길을 힘겹게 오르는 사내를 만났다. 그의 등산복은 땀으로 등에 흠뻑 붙어 있었고, 몇 걸음마다 멈칫하며 숨을 골랐다. 아마 나보다 한참 아래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붉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며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딛는 그의 모습에서, 지난 세월 어떻게든 삶을 버텨내려 애쓰던 나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제 나는 내려가고 그는 올라간다. 조금 전까지 내가 힘겹게 지나온 그 오르막을 이제 그가 오르고 있었다.


나는 잠시 길 옆으로 물러서서 그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 역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옅은 미소와 함께 목례로 답한다.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짧은 순간 서로의 고단함을 알아챘다는 침묵의 동의가 산길의 서늘한 공기를 따스하게 채웠다.


그가 지나간 뒤에도 랜턴 불빛은 한동안 나뭇가지 사이에서 아른거리며 흔들렸다.


이름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


다만 오늘 새벽, 같은 별 위를 잠시 함께 걸었다.




*같이 보면 좋은 글

〈도토리와 칠판가루〉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이전 23화욕망의 건너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