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으로 가는 길

by선비천사

산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은 소래산 자락의 나지막한 밥집,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된장찌개 뚝배기 너머로 아내의 손을 가만히 바라본다. 수저를 쥐는 아내의 마디 굵은 손가락 끝에 묻어나는 미세한 떨림이, 찌개 위로 피어오르는 하얀 김 속에 서서히 풀려간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오래 식어 있던 속이 서서히 풀린다. 이 온기를 채우기 위해, 나는 평생 참 멀고도 험한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문득 머리를 스친다. 인생이란 결국 비어 가는 속을 무언가로 채우기 위해 숟가락을 움켜쥐고 끊임없이 허기를 달래러 가던 긴 여정에 다름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스름한 연기 속에서 기억은 가장 먼저 양은 도시락 모퉁이의 찌그러진 흔적을 찾아간다. 그 시절의 배고픔은 왜 그리도 정직하고 거대했는지 모른다. 등 뒤에서 달그락거리던 찬합 소리는 아침마다 등굣길을 재촉하는 가벼운 발걸음이었지만, 사방이 막힌 교실 안에서 점심시간이 되기도 전에 풍겨오던 짭조름한 단무지와 계란 냄새는 소년의 영혼을 온통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칠판을 향해 눈을 고정하고 있으면서도, 바카라상 밑 서랍 틈으로 살며시 열어젖히던 얇은 알루미늄 뚜껑의 가벼운 마찰음. 선생님이 뒤를 돌아서는 찰나에 입안 가득 밀어 넣고 녹이듯 우물거리던 식은 밥 한 덩이는, 숨 막히는 교실 안에서 유일하게 허락된 작은 일탈이자 구원이었다.


그 달콤하고 서늘했던 밥맛은 청춘의 한 길목에서 아주 무겁고 딱딱한 식판의 질감으로 바뀌었다. 훈련소 교장의 매캐한 흙먼지가 입술에 버석거리던 시절, 식사는 생존과 굴욕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의식이었다. 옆구리에 식판을 끼워 넣은 채, 악에 바친 구령으로 군가를 부르며 식당으로 향하던 길. 대열이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식판을 든 채 연병장 차가운 자갈밭을 오리걸음으로 기어가야 했다. 그때 내 시선이 닿았던 곳은 연병장 끝, 허옇게 김이 서린 식당의 낡은 유리창뿐이었다. 흙먼지를 털 새도 없이 무작정 식판을 내밀었다. 식판 위로 받아 든 뜨겁고 묽은 국 한 그릇, 그것이 그날 삶의 전부였다.


내 손으로 삶을 꾸려가기 시작하면서부터 밥은 바카라임을 감당해야 하는 무게로 다가왔다. 일터라는 거친 전선에서 온종일 긴장과 피로에 지쳐가던 날들. 마침내 4교시 종소리가 울리면, 나는 땀이 밴 소매를 걷어붙이고 동료 교사들과 나란히 식판을 마주했다. 무심하게 국을 떠먹던 그 짧은 점심시간, 식판 위로 부딪히던 숟가락의 낮고 경쾌한 금속성 소음들은 매일 조금씩 닳아가던 나를 묵묵히 지탱해 주던 일상의 튼튼한 뼈대였다.


그 길고 지난한 밥벌이의 고단함은 주말이면 어린 자식들의 입으로 맛있는 고기 한 점을 밀어 넣는 깊은 기쁨으로 보상받았다. 소문난 밥집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동안, 뒷좌석에서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백미러로 훔쳐보며 나는 비로소 내 밥값의 고귀한 무게를 실감했다. 내가 삼키는 밥보다 내 아이가, 내 아내가 오물거리며 삼키는 그 정갈한 숟가락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허기는 거짓말처럼 채워지곤 했다.


치열했던 슬롯적 역할의 무대에서 한 걸음 물러선 지도 이제 제법 시간이 흘렀다. 매일 아침 나를 채근하던 분주한 종소리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아침이 오면 나는 아내의 느려진 보폭에 발을 맞추며 집을 나선다. 소래산 자락 아래 아름드리 서 있는 늙은 나무들 사이를 느긋하게 걸으며 가닿는 식탁은 더 이상 시간에 쫓기지 않는다. 뚝배기 안에서 마지막 거품을 뿜어내며 식어가는 찌개를 바라보는 황혼의 식탁은 참으로 고요하다. 거칠게 식판을 쥐던 젊은 날의 손아귀엔 힘이 빠졌고,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뜨거운 갈증도 이제는 슴슴한 나물 반찬처럼 부드럽게 길들여졌다.


하지만 이 아늑한 포만감의 끝자락에는 늘 피할 수 없는 서늘한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는 이 밥집에도 내 발로 찾아오지 못할 날이 올 것이다. 숟가락 하나 드는 일조차 버거워질 것이다. 타인의 손길에 기대어 받아먹는 미음이 내 하루의 전부가 될지도 모른다. 더 이상 그 숟가락조차 들지 못하는 어둠이 찾아오면, 오직 숨을 이어가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는 낯선 방식의 식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것 역시 내가 묵묵히 받아들여야 할 생의 마지막 만찬이다.


뚝배기가 바닥을 드러내며 내는 가벼운 숟가락 소리에 잡념이 흩어진다. 아내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입가를 훔치며 넌지시 웃어 보인다. 계산을 마치고 문을 나서자, 어느새 산 아래 골목길엔 저녁노을이 붉게 번지고 있다. 사방에서 찌개 끓는 냄새와 뜸 드는 밥 냄새가 은근히 번져 나오는 시간. 골목 저편에서 금방이라도 "철호야, 밥 먹어라" 하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가만히 걸음을 멈춘다. 평생 허기를 채우기 위해 분주히 걸었던 그 길 끝에서, 나는 아내의 마른 손을 꼭 쥐고 집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같이 보면 좋은 글

발음 하나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빈 주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