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주머니

by선비천사

추석 당일, 온 친척이 모여 강화도로 성묘를 갔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들판은 가을볕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청명했다. 섬을 떠나는 사람이 하나둘 늘면서 고향 마을은 오래전부터 활기를 잃었고, 간간이 마주치는 노인의 발걸음은 가을바람만큼이나 더디기만 했다.


산으로 오르기 며칠 전, 아내와 함께 시장을 지난 적이 있었다. 좌판에 수북이 쌓인 굵은 밤알을 보자마자 홀린 듯 걸음을 멈췄다. 기계에 넣고 드르륵 깎아낸 하얀 생밤 한 봉지를 만 원에 사 들고 집으로 오는 길, 우리는 나란히 걸으며 달고 고소한 밤을 오도독거리며 씹어 먹었다. 힘들이지 않고 얻은 단맛이었다. 그런데 한 봉지를 거의 비워갈 때까지도 어쩐지 입안이 허전했다.


며칠 뒤 도착한 강화도의 조상 묘소는 오랜 세월 사람의 손길을 온전히 받아내지 못한 채 거칠게 헝클어져 있었다. 잡목이 억세게 우거지고 마른 덩굴이 발목을 옥죄는 비탈은 오르기조차 버거웠다. 예전에는 벌초가 말끔히 되어 있고 사람들이 밟고 다져놓은 길이 명확했으나, 이제 그 흔적마저 희미하게 지워져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비탈을 오르다 문득 발길을 멈춰 세웠다. 낙엽이 쌓인 흙더미 위로 붉은 밤톨들이 눈처럼 수북했다. 벌어진 밤송이 밖으로 툭 튀어나온 알들은 굵고 실했다. 서늘한 가을바람에 나뒹구는 밤들이 발길에 무심히 차였다. 앞서 가던 어른이 혀를 차듯 짧은 한숨을 뱉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주워 담으려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옷소매가 터지도록 주워 모았을 열매들이, 비탈의 풀숲에서 그대로 뒹굴다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다.


그 붉은 알맹이들을 마주하자, 시간의 두꺼운 껍질이 한꺼번에 벗겨져 내렸다. 가을의 문턱을 넘어서기 무섭게 동네 아이들은 깡통이나 자루를 하나씩 끼고 온 산을 헤집고 다녔다. 누가 먼저 남보다 실한 밤나무 아래를 선점하느냐가 그 시절 아이들이 치르던 가장 치열한 전쟁이었다. 가시 돋친 밤송이를 나뭇가지로 털어내고, 신발로 짓밟아 벌어진 틈에서 알찬 밤을 골라내는 일은 그 어떤 놀이보다 가슴 뛰는 모험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외투 주머니는 밤알로 터질 듯 묵직했다. 혼날 것을 알면서도 하나라도 더 주워 넣었다. 손톱 밑이 새까맣게 때가 끼고 뾰족한 가시에 찔려 핏방울이 맺혀도 아픈 줄을 몰랐다. 집에 오면 참지 못하고 마루 끝에 엉덩이를 붙였다. 단단한 겉껍질을 겨우 벗겨내면 떫은 속껍질이 버티고 섰다. 칼을 찾기 귀찮고 마음이 급해, 아이들은 이빨로 율피를 갉아 내고 밤을 먹었다. 입술과 혀끝이 시커먼 떫은 물로 물들어 서로를 보고 낄낄거리던 그 웃음, 입안 가득 퍼지던 생밤의 고소함은 온 세상을 가진 듯한 달콤함이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현재의 산세를 본다. 밤알이 지천으로 널려도 아무도 줍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다. 산을 지키는 이들은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뿐이고, 명절에 잠시 찾아오는 자식들은 성묘를 마치기 바쁘다. 설령 사람이 있다 한들 아쉬울 것 없는 세상이다. 마트에 가면 사방에 먹을 것이 넘쳐나고, 시장에 가면 기계가 대신 껍질을 벗겨주는 시대다. 뉘가 허리를 숙이고 가시에 찔려가며 밤을 주울 것인가.


귀함이 사라진 자리에 무관심이 고였다. 빈집이 늘고 밭이 풀밭으로 변해가는 마을과, 아무도 줍지 않는 밤톨들이 이상하리만큼 닮아 보였다.


발끝에 차이는 밤알들을 내려다본다. 나무는 해마다 제 몫의 열매를 땅으로 떨구지만, 그것을 주워갈 사람은 이제 드물다.


성묘를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길, 옷깃에 성가시게 달라붙은 도깨비바늘을 툭툭 털어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찬란한 가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람이 주워가지 않아도 밤톨들은 묵직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땅에 떨어져 단단한 껍질을 찢고 싹을 틔우며, 기나긴 겨울의 추위를 견뎌낸 뒤 다시 새로운 나무로 자라날 터였다. 사람이 주워가지 않은 밤 가운데 몇 알은 내년 봄 단단한 흙을 밀어 올릴 것이다.


마침내 차에 시동이 걸리고, 강화도의 너른 들판이 멀어져 갔다. 붉은 밤알들이 쌓여 있던 산속은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으나, 발끝에 차이던 밤톨의 묵직한 감촉은 오래 남았다.


차가 산을 벗어날 때까지 나는 빈 주머니에 몇 번이고 손을 넣었다. 어린 날 같았으면 그 속에서 밤알 두어 알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을 것이다.




*같이 보면 좋은 글

섬의 언어


이 글의 행간에 다 담지 못한 더 많은 그림과 소박한 기록들은 저의 개인 블로그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든 편히 들러주세요.

� 작가 방철호의 블로그 방문하기

[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흙빛 정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