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 구석, 잡풀이 우거진 시궁창 언저리나 뒤꼍의 쓰레기 더미를 파헤치다 보면 어김없이 서슬 퍼런 빛이 얼굴을 내밀곤 했다.
흙 때를 완고하게 뒤집어쓴 채, 그러나 한쪽 날만은 시퍼렇게 벼린 채 숨죽이고 있던 사기그릇의 파편들.
우리는 그것을 ‘사금파리’라 불렀다.
어린 시절의 소꿉놀이는 늘 그 위험천만한 조각들을 흙 속에서 발굴하는 일로 시작되었다.
가마솥에서 갓 퍼 올린 하얀 쌀밥 대신 모래흙을 소복이 담아내던 대접도, 이파리를 짓이겨 만든 만찬을 담던 종지도 모두 사금파리였다.
조심한다고 손가락을 오므려도 결국에는 보드라운 살갗 위에 붉은 피가 맺히고야 말았다.
쓰라림에 눈물을 찔끔 흘리면서도, 우리는 그 조각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깨진 단면이 햇빛을 받을 때마다 눈이 부시도록 시리게 반짝였기 때문이다.
그것이 누군가의 일상이 깨져나간 흔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기에는, 우리 손은 너무 부드럽고 무지했다.
철이 들고 밭을 갈거나 삽을 깊이 찔러 넣을 때마다 쇠날 과 부딪쳐 ‘쨍-’ 하고 날카로운 금속음을 지르던 그 파편들은 다 어디서 흘러나온 것일까.
그 시절의 부엌은 빙하기의 계곡 같았다. 차가운 개숫물 소리와 그릇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둔탁한 소리가 가실 날이 없었다.
삼대(三代)의 식탁이라는 거대한 질서를 지탱하기 위해, 며느리들의 손끝은 흰 사기그릇의 표면처럼 매끄럽게 닳아갔다.
부엌 바닥에 산산조각 난 흰 사기대접.
그것은 가부장이라는 신전 아래 허락된 유일한 파열이었다.
화가 난 시아버지가 상을 물리치며 던진 분노였을지도 모른다. 종일 밭일에 지친 새댁의 손에서 미끄러진 고달픈 실수였을지도 모른다.
혹은, 한때 자신도 똑같은 서러움을 견뎠을 시어머니가, 대물림되는 고단함을 참지 못하고 부엌바닥에 내던진 체념이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도 온전한 가해자도, 온전한 피해자도 아니었다.
그 부엌 안의 모두가 서로를 깨뜨리는 질서 속에서 함께 마모되어 가던 시절이었다.
그릇은 깨어지는 순간에만 울고, 평생을 침묵한다.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한밤중 마을 우물에 몸을 던졌다던 경석이네 며느리의 소문이 돌던 날에도, 동네 부엌에서는 여전히 그릇들이 부딪치며 서글픈 생활의 소리를 냈다.
얼마 후 저수지 푸른 물결 너머로 영영 돌아오지 않는 길을 택했던 채은댁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마당 구석에서 유난히 붉은 진흙이 달라붙은 사금파리 하나를 발견했었다.
마치 제 형체를 다 지키지 못한 삶들이 흙속으로 스며들어 이 시퍼런 조각이 된 것만 같았다.
흙은 지극한 모성으로 그 날카로운 비명을 거두어들였다.
상처 난 살점을 덮듯, 대지는 사금파리의 시린 모서리를 흙먼지로 덮어 무덤을 만들었다.
봄이면 밭을 갈아엎는 호미 끝에, 가을이면 마당을 정리하는 삽날 끝에 부딪쳐 나오는 그 건조한 소리는, 어둠 속에서 켜켜이 쌓인 여인들의 숨결이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는 가느다란 신호였다.
이제 대가족의 엄숙한 그늘도, 서슬 퍼런 시집살이의 악습도 먼지 속에 묻힌 시대가 되었다. 헌신과 희생이라는 단어 역시 빛바랜 유물처럼 취급받는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시골길을 걷다 발끝에 차이는 사금파리를 보면 걸음을 멈춘다.
그것은 시대를 건너온 편지이기 때문이다.
허리를 굽혀 흙 묻은 조각 하나를 조심스레 집어 든다. 거친 흙을 털어내고 엄지손가락으로 시퍼런 날을 가만히 쓸어본다.
손끝에 번지는 서늘하고 아찔한 촉감.
거기에는 완전했던 시절의 둥근 형태를 잃어버리고서도 여전히 자신만의 각도를 유지한 채 살아 있는 한 시대의 지문이 묻어 있다.
이 작은 조각들은 단순히 버려진 파편이 아니다.
깨어지고 부서진 삶 속에서도 끝내 자신을 지워내지 않았던 사람들의 시간이다.
햇빛을 향해 사금파리를 들어 올린다. 흰 단면 위에서 눈부신 빛이 부서진다.
그 빛은 과거를 비추는 데 그치지 않는다. 지금을 사는 내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떤 형태의 그릇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사금파리는 오늘도 흙 속에서, 오래된 침묵의 언어로 말없이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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