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마음의 바탕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이 잦아진다. 문득 돌아보면 내 마음의 지층 구석구석에는 문지를수록 더 번져가는 얼룩들이 서려 있다. 살아가며 수많은 타인을 지워내고 잊었다고 생각했건만, 지울 수 없는 마음의 얼룩을 남기는 것이 인간의 인연이었음을 나이부스럼처럼 깨닫는다.
모든 만남의 첫 장은 봄날의 창가처럼 눈이 부시다. 낯선 존재와 시선이 얽히고, 생의 궤적이 우연히 맞물릴 때 우리는 삶이라는 황량한 캔버스 위에 새로운 색채 하나가 덧칠해지는 황홀을 경험한다. 그러나 일상의 빛 아래에서는 그 사랑도 조금씩 본래의 얼굴을 드러낸다. 달콤한 착각의 안개가 걷히고 나면, 그 자리엔 날것 그대로의 성격이 민낯을 드러낸 채 서로를 겨누기 시작한다.
결혼은 가장 오래 견디는 수행이다. 서로 다른 삼십 년의 세월을 통과해 온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식탁을 공유한다는 건, 매일 상대의 다름을 견뎌내며 스스로를 마모시켜야 하는 소리 없는 수행이다. 얼마 전, 아내와 사소한 말다툼을 하고도 며칠 동안 마음이 무거웠던 적이 있다. 젊은 날 같으면 내 옳음과 상식만 앞세워 상대를 꺾으려 들었을 텐데, 이제는 그 팽팽한 긴장감 자체가 영혼을 갉아먹는 피로로 다가왔다. 서로의 다름을 메우기 위해 부단히 나를 깎아내고 상대의 틀에 짜 맞추다 보면, 문득 가슴 한구석이 허해진다. 타인을 연명시키기 위해 정작 나라는 존재의 본질을 먼저 지워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씁쓸함이 밀려오는 탓이다.
이러한 생의 피로감은 세월을 공유해 온 친구라 하여 비껴가지 않는다. 유년의 시절에는 그저 같은 골목길의 냄새를 맡고 비슷한 울타리 안에서 뛰놀았다는 이유만으로 쉽게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각자의 직업과 경제적 처지가 달라지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은밀하게 멀어진다. 오랜만에 만난 삼십 년 지기 친구 녀석이 찻집 탁자 너머에서 마주 앉았을 때, 어느새 대화는 자식 이야기와 재산 이야기로 흘러갔다. 나는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마땅한 언어의 주파수를 찾지 못해 겉도는 침묵을 견뎌야 했다. 돌아오는 길의 마음이 더 헛헛할 것을 알면서도, 함께 보낸 세월의 무게에 저당 잡혀 관성처럼 약속을 잡는 행위는 서글프다. 가깝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예의를 생략한 채 함부로 던지는 말들은 차라리 낯선 타인의 무례함보다 더 깊고 쓰라린 자상을 남기곤 한다.
돌아보면 세상의 그 어떤 인연도 영원히 무해한 상태로 곁에 머물지는 못했다. 피를 나눈 가족도, 삶을 위탁했던 연인도, 심지어 그 어떤 계산이나 배신 없이 온전한 사랑만을 건네주던 반려동물마저도 그러하다. 그 부드러운 생명들은 인간처럼 마음을 할퀴지는 않지만, 인간보다 훨씬 빠르게 흐르는 그들의 짧은 생으로 인해, 결국 우리 가슴에 ‘상실’이라는 가장 거대한 흉터를 남긴 채 안개처럼 사라진다. 애초에 마음의 한 자락도 내어주지 않았다면 실망할 일도, 떠나간 빈자리를 보며 눈물 흘릴 일도 없었을 테니, 생의 끝자락에 남는 얼룩의 깊이는 우리가 그 관계에 쏟아부었던 진심의 총량과 정확히 비례하는 셈이다.
이제는 무언가를 쥐려던 손을 비우고, 지나온 인연의 궤적들을 가만히 조망한다. 내 영혼의 안뜰은 이미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이 남긴 하얀 흔적들로 자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서글픈 결말과 상처를 뻔히 예견하면서도 우리가 또다시 누군가에게 마음의 문을 슬그머니 열어주는 것은, 그 인연들이 한때 내 삶의 가장 캄캄했던 한 철을 눈부시게 지탱해 주었던 순간의 온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치열하게 마음을 주고받으며 흔적을 남기던 비바람의 계절은 가고, 이제는 얼룩진 내면을 담담히 응시하는 서늘한 안목의 시간이다. 타인의 기분보다 내 내면의 평화를 위해 이제는 조금 느슨한 여백을 두기로 한다. 팽팽하게 당기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가만히 걸려 있는 다리처럼, 남은 인연들과도 그저 서늘하고도 다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유유히 흘러가고 싶을 뿐이다.
돌아보면 상처를 준 것도 인연이었지만, 그 상처 입은 자리에 돋아난 새살을 어루만져 준 것 역시 또 다른 인연이었다.
인연은 끝나도 흔적은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기억보다 흔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 흔적 위를 걸으며 조금씩 늙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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