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시간을 기억하는 곳

by선비천사

인천에서 가장 큰 공원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대개 인천대공원을 먼저 떠올린다. 정연하게 가꾸어진 숲과 호수, 계절마다 피어나는 화려한 꽃들. 주말이면 분수대 주변으로 자전거 바퀴 구르는 소리와 아이들의 울림이 사방으로 번져나간다. 흠잡을 데 없이 매끄럽게 가공된, 누구나 만족할 만한 안락한 휴식처다. 그러나 나는 질그릇의 은은함에 마음이 먼저 기우는 사람이다. 발걸음이 더 자주 향하는 곳은 의외로 소래습지생태공원이다.


처음 이곳을 찾는 이들은 대개 당황한다. 공원으로 들어서는 길목은 비좁고 옹색하다. 입구 주변을 먼저 채우고 있는 것은 푸른 나무가 아니라 낡은 공장 지대의 회색 굴뚝과 투박한 건물들이다. 주차장 역시 넉넉하지 않아 외지인에게 친절한 첫인상을 건네지 않는다. 매끄러운 환대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곳의 첫 얼굴은 쓸쓸하고 허전할 뿐이다.


다리를 건넌다. 도시의 소음이 물러간 자리에 전혀 다른 결의 시공간이 열린다. 발아래로는 뱀의 몸짓처럼 굽이치는 갯골이 흐르고, 그 길을 따라 끝을 알 수 없는 갯벌이 누워 있다. 바닷물이 물러가며 남겨놓은 무늬는 대지가 세월을 견디며 새긴 손금이다.


그 짠 땅 위에서 칠면초와 나문재 같은 염생식물들이 군락을 이룬다. 봄에는 수줍은 연둣빛으로 깨어나 한여름에는 짙푸른 녹음이 되더니,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마침내 붉은 빛깔로 갯벌 전체를 덮어버린다. 변화는 은근하고 묵직하다. 바라보고 있으면 세상의 속도에 쫓겨 마구 치닫던 마음의 시계태엽이 서서히 풀림을 느낀다.


산바카라길로 접어들면 길가에 점점이 박힌 붉은 해당화 열매가 눈길을 붙잡는다. 꽃이 피던 봄날의 찬란함보다, 모진 바닷바람을 견뎌내고 알알이 묵직함을 채워낸 지금이 더 깊은 시간을 품은 듯하다. 길을 따라 늘어선 소나무들은 바다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걸러낸다. 솔향기와 갯벌의 짭조름한 짠 내음이 공중에서 한데 섞인다.


갯벌 위로 나무 데크길이 길게 뻗어 있다. 바람이 분다. 갈대가 먼저 안다. 갈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저희들끼리 몸을 비비며 낮게 운다. 그 서늘하고도 다정한 소리를 배경 삼아 걸음을 옮긴다. 물길을 따라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발아래 진흙 구덩이 속에서는 짱뚱어가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손톱만 한 작은 게 들은 인기척에 놀라 재빨리 구멍 속으로 몸을 숨긴다.


지금은 이토록 평화롭지만, 사실 이 넓은 대지는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었다. 1930년대부터 천일염을 생산하며 수도권의 소금 산업을 이끌었던 거대한 염전. 바닷물을 가두어 볕과 바람으로 말리며 염부들의 땀방울이 맺히던 곳이다. 그러나 산업의 구조가 바뀌면서 염전은 폐쇄되었고, 한동안 기억에서 잊힌 황무지로 남겨졌었다. 빛바랜 소금창고와 풍차, 그리고 낡은 수문은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다. 세월의 무게와 인간의 노동이 새겨진 산업유산이며, 인간이 떠난 자리를 자연이 어떻게 스스로 치유하고 품어 안았는지를 보여주는 흔적이다.


소금창고의 흐릿한 지붕을 바라보고 있으면 지나온 삶의 궤적이 겹쳐진다. 삼십여 년 넘게 매일 아침 교단에 섰다.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어주겠노라 사명감을 쥐고 슬롯를 가르쳤지만, 퇴직한 뒤에야 알았다. 지워진 것은 칠판의 글씨가 아니라, 그 앞에 서 있던 나였다는 것을. 그 쓸쓸한 계절에 나를 묵묵히 품어준 것이 바로 이 소래습지였다. 바닷물이 빠져나간 뒤 홀로 남은 갯벌의 허전함이 꼭 내 등 뒤를 닮아 있었다.


공원 곳곳에 자리 잡은 정자와 조류관찰대에서는 걸음을 멈추게 된다. 신기하게도 이곳에서는 목청을 높여 소란스럽게 대화하는 사람이 드물다. 넓게 열린 풍경 앞에서 사람들은 저절로 입을 닫고 귀를 연다. 갈대를 흔들고 가는 바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지평선 저 멀리 시선을 던진 채 한동안 말없이 멈추어 서 있는다. 소란스러운 세상의 속도는 이곳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나는 삶이 소란스러운 날보다, 오히려 아무런 일도 없는 고요한 날 이곳을 찾는다. 정답을 찾으려 애쓰지 않고 그저 한 바퀴 걷는다. 그러면 참 신기하게도, 돌아갈 때쯤이면 내가 안고 왔던 문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음에도 그것을 바라보는 마음의 결은 달라져 있다. 갯골은 다름없는 모양으로 묵묵히 흐르고, 갈대 역시 같은 방향으로 흔들리지만, 그 풍경을 오래도록 응시하는 동안 내 마음의 모서리가 조금은 둥글게 깎여 나간 덕분이다.


떠들썩하지 않으면서도 걸음걸음마다 숨은 표정을 건네주는 산바카라길이 참 아름답다. 소금기 머금은 척박한 땅에서도 끝내 붉은 빛깔을 피워내는 염생식물의 끈질김은 내 성정과 닮아 있고, 또 내가 닮아가고 싶은 모습을 하고 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요란하게 광고하지 않고, 오직 천천히 걷는 사람에게만 풍경을 하나씩 꺼내어 보여주는 그 겸손함이 고마울 따름이다.


다시 좁은 다리를 건너 일상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습지를 바라본다. 사람은 풍경을 기억한다고 믿지만,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남는 것은 풍경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풍경을 바라보던 날의 내 마음에 가깝다.


바람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듯 불어 간다. 그러나 그 바람을 바라보던 나는 매번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 습지로 돌아간다.


소래습지는 내게 풍경이 아니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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