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쓴다

by선비천사

어느 날 아침, 모니터를 켜고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다가 내가 글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에 단단히 묶여 있음을 실감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나는 매일 새벽 거르지 않고 바카라상 앞에 앉았다. 일종의 정직한 노동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내 안의 남은 이야기들을 밖으로 꺼내놓고 싶었을 뿐이다. 온라인 게임을 물러난 뒤 찾아온 고요 속에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세상과 조우하고 싶었다. 다만 그 대상이 눈앞의 살아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라, 모니터 너머의 얼굴 모를 대중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나는 참 부지런히 움직였다. 블로그라는 공간에 매일 글을 채웠고, 인스타그램과 스레드라는 광장에도 거르지 않고 글과 사진을 올렸다. 5개월 전에는 조금 더 글에 집중하는 이들이 모인다는 온라인카지노에까지 작게 자리를 틀었다. 뒤를 돌아보면 밀려오는 허무에 발목이 잡힐까 봐, 오직 앞만 보며 자판을 두드렸다.


인터넷 세상의 반응은 냉담하리만치 무거웠다. 고심하여 내면을 긁어내어 지은 글 앞에는 기묘한 침묵이 흐르는데, 무심코 올린 일상의 풍경이나 맛있는 음식 사진 한 장에는 즉각적인 호응이 쏟아졌다.


숫자로 증명되는 디지털 공간에서 조회수와 구독자 수는 숨을 곳 없는 투명한 성적표였다. 한때 수많은 사람 앞에서 중심을 잡으며 내 목소리로 공간을 채우던 시절이 무색하게, 이 광활하고 시끄러운 온라인 광장에서는 그저 외로운 독백을 이어가는 무명의 노신사에 불과했다.


최근 몇 주 동안은 바카라상을 마주하는 일이 고역이었다. 가슴 언저리에 무겁고 축축한 앙금이 가라앉았다. '내가 지금 무엇을 위해 이토록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는 걸까?', '내가 쏟아낸 문장들은 그저 나만의 허허로운 메아리에 불과한가?' 질문은 밤새 꼬리를 물었다.


그 막막함이 바닥까지 차올라 손끝 하나 까딱하기 싫던 날, 역설적이게도 나는 다시 자판 위에 손을 올렸다. 이 지독한 갈증을 다스릴 방법 역시 내게는 글을 쓰는 일 외에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참 우스운 노릇이다. 나를 아프게 한 장본인에게 다시 위로를 구하며, 상처를 준 도구를 쥐고 다시 상처를 치료하려 들다니.


이번에는 잘 보이려는 욕심을 떼어냈다.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으려 부리던 잔기술도, 매끄럽게 포장하려던 가식도 던져버렸다.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지치면 지친 대로, 아무런 성과가 없어 억울하면 억울한 대로 내 안의 소리를 날것 그대로 받아 적었다.


"언제까지 쓸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냥 쓴다."


그 문장을 적어 놓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래 버티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의외로 이런 짧은 다짐인지도 몰랐다. 도착해야 할 목적지가 희미해지자, 비로소 내가 딛고 서 있는 발밑의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삶이라는 지난한 여정에서 진짜 묵직한 울림을 주는 것은, 화려한 정상의 모습보다 거친 바람을 맞으며 묵묵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아니었던가.


이제 나는 대단한 명성을 얻거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극적인 반전을 꿈꾸지 않는다. 비록 매일 아침 켜지는 조회수 창을 보며 여전히 조바심을 내고 미련을 가질지언정, 자판을 누르는 시간을 더는 결과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적어도 글을 쓰는 그 적막한 시간만큼은, 내가 내 삶의 온전한 주인이었으니까.


오늘도 나는 그 보이지 않는 끈을 따라 문장을 이어 붙인다. 화면이 새벽을 삼킬 때까지. 그리고 내 안의 이야기가 스스로 멈출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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