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소풍을 앞둔 전날 밤은 언제나 하얗게 새어 나갔다. 새로 산 신발을 머리맡에 바르게 맞춰 두고, 내일 마주할 미지의 언덕을 상기하느라 섣불리 눈을 감지 못했다. 초침 소리가 유난히도 방바닥을 크게 두드리던 그 밤, 잠의 언저리를 서성이던 설렘의 기억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내 마음에 생생한 무늬로 남아 있다. 머리가 희끗해진 어른이 되어서도 떠남은 늘 그랬다. 간이역에 내릴 때의 서늘한 공기, 일상의 궤도를 벗어날 때 찾아오는 해방감은 삶의 굳은살을 위로하는 유일한 처방이었다.
어스름이 유독 길게 고이는 거실 창을 본다. 창에는 어느덧 육십을 넘긴 내 얼굴이 비친다. 지나온 수많은 날 동안 세상의 이치와 삶의 굴곡을 다 겪으며 살아왔건만, 정작 내 생의 마지막 단원인 ‘죽음’이라는 문턱 앞에서는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서툰 아이처럼 멍하니 서 있게 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마른 기적 소리에 귀가 익숙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서 삶의 마지막 기차가 당도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 그 자명한 사실이 문득 서늘하게 내려앉는 밤이 있다.
보통의 날들은 죽음을 쉽게 잊게 만든다. 아침 햇살이 다정하고,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온기가 잔잔하며, 날마다 마주하는 소래산 자락의 초목들이 푸르기에 우리는 마치 영원히 이 지상에 머물 것처럼 평화로운 일상을 누린다. 그러나 밤의 장막이 내리고 사방이 침묵에 잠기면, 그 평화의 이면에서 기어이 두려움이 고개를 든다. 소리 없이 다가와 내 이름을 부를 저승사자의 손길, 정든 이 방과 바카라상을 두고 홀로 떠나야 한다는 단절의 고독.
숨을 고르며 생각을 고쳐먹는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외길이라면, 도망치다 붙잡혀 끌려가기보다는 스스로 배낭의 지퍼를 열고 여장을 꾸리는 여행자가 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죽음을 준비할수록 오늘 하루가 더 선명해진다. 먼 길을 떠나기 전, 조심스럽게 지도를 살피고 필요한 여비를 챙기듯 나의 마지막 돌아갈 길을 다시 ‘소풍’이라는 어린 날의 언어로 번역해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승으로 떠나는 여행의 가방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비워내는 궤적을 따른다. 서랍 깊은 곳에 쟁여둔, 이제는 주인을 잃은 해묵은 영수증들을 정리하듯 마음의 군더더기부터 털어낸다. 살아가며 악착같이 움켜쥐고 있던 부질없는 명예욕이나 서운함, 오만한 집착들을 하나씩 내려놓는 연습이다. 낡은 칠판 위에 가득했던 낙서들을 지우개로 지워내듯, 내 생의 얼룩을 부드럽게 닦아내는 비움의 의식이다.
가방을 정리하다가 신발장 구석의 낡은 등산화를 오래 들여다보았다. 아내와 함께 오르내리던 산길의 흙이 아직도 굽 사이에 남아 있었다. 바카라상으로 돌아와 손때 묻은 만년필을 천천히 닦았다. 그 두 가지를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미리 여장을 꾸린 죽음은 더 이상 공포나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지상에서의 긴 소풍을 마치고 마침내 돌아가야 할 집으로 향하는 늦은 저녁의 퇴근길이자, 하루의 햇살을 다 쓰고 돌아가는 귀갓길이다. 준비를 마친 여행자는 문턱 앞에서도 그리 떨지 않는다. 오히려 그곳에는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먼저 건너간 그리운 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마중을 나와 줄지 은밀한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새벽안개가 걷히는 산자락을 따라 오래 걸었다. 한 걸음은 아직 허락된 지상에서의 디딤돌이요, 다른 한 걸음은 저 언덕 너머로 이어질 길의 예행연습이다. 언젠가 그날이 와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면, 나는 놀라 허둥대지 않으리라. 오래전 소풍 전날 밤, 머리맡에 가방을 두고 잠을 설쳤던 아이처럼 조용히 배낭을 메고 일어서리라.
나는 오늘도 마지막 여행을 위해 조용히 여장을 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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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바카라] 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마음이 남았다 | 방철호 | 알라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