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배운 친절은, 나를 베는 칼날이었다

by선비천사

일본에서 돌아온 뒤, 나는 한동안 지독한 부끄러움에 시달렸다. 그들의 친절은 결코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정교하게 잘 갈린 칼날처럼 나를 베고 들어왔다. 30년 넘는 세월을 세상의 이치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았건만, 정작 나는 ‘친절’이라는 단어의 진짜 무게를 단 한 번도 감당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깨달았다.


시흥 대야동의 새벽은 중장비가 내뱉는 금속성 비명으로 문을 연다. 창밖 소래산의 능선이 푸르스름하게 깨어날 때, 나는 습관처럼 노트북 앞에 앉아 지난 여행의 잔상들을 복기한다. 쏘나타를 몰고 산자락을 오르내리며 마주하는 일상의 풍경들이 이번 여행 이후로 사뭇 다르게 읽히기 시작했다.


일본의 공항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하고 정중했다. 그 낯선 평온함은 여행 내내 이어졌다.


한 번은 교토의 좁은 골목에서 길을 잃었을 때였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청년에게 길을 물었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자전거를 돌려 내가 가야 할 방향으로 앞장서기 시작했다. 5분 남짓한 거리를 동행해 목적지 앞에 나를 세워둔 그는, 땀을 닦으며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그가 가던 방향은 내 목적지와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전율했다. 저 청년은 방금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베어내 나에게 주었다. 그들의 친절은 마치 잘 갈린 칼날 같았다. 흐트러짐이 없었고, 상대를 위해 자신의 편안함을 단칼에 베어내는 결단이 서려 있었다.


그제야 나는 ‘친절(親切)’이라는 한자를 다시 뜯어보았다.

‘친할 친(親)’에 ‘끊을 절(切)’.

글자 그대로 풀면, 가까운 이의 고통을 대신 끊어주는 일이다. 무사가 할복할 때 곁에서 고통을 끝내주기 위해 목을 쳐주던 ‘카이샤쿠닌’의 행위에서 그 어원을 찾는 이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그 단어는 따뜻하기보다 먼저 서늘하게 다가왔다. 결국 친절이란 상대를 위해 나를 조금 베어내는 일, 살이 베일 만큼 가깝고 절실한 마음이 아니면 행할 수 없는 지독한 자비인 셈이다.


그 서늘한 정의 앞에 서자 나의 지난날들이 부끄럽게 솟아올랐다. 나는 늘 내 생각의 감옥에 갇혀 지냈다. 글을 쓴다는 핑계로, 혹은 나만의 고뇌가 깊다는 자만으로 곁에 있는 이들의 시선을 외면하곤 했다. 아내의 조용한 부름을 못 들은 척 지나치고, 강화도 고향 집에서 홀로 시간을 견디는 아버지의 적막을 '바쁘다'는 핑계로 베어내지 못했다.


나의 친절은 언제나 내 안위가 보장된 뒤에야 베푸는 값싼 적선에 불과했다. 아마 많은 사람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만 상냥하고, 내 기분이 좋을 때만 타인을 배려한다. 나 역시 그랬다. 아니, 지금도 자주 그렇다.


일본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달랐다. 그것은 상대를 위해 자신의 ‘번거로움’과 ‘소심함’을 칼로 베어내는 치열한 자기 절제였다. 내성적이고 수줍음 많은 그들이 타인에게 그토록 정중할 수 있는 이유는, 스스로를 베어내어 타인의 자리를 만드는 고통을 감내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나는 강화도 고향 집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와 마음속 밭을 매고 계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다시금 ‘절(切)’의 의미를 새긴다. 누군가를 향해 웃어주는 일은, 실은 나라는 견고한 성벽을 허물고 나를 베어내는 아픈 일이다. 이번 여행에서 돌아오며 나는 다짐했다. 내 안의 웅크린 생각들을 단칼에 베어내고, 더 많이 듣고 더 깊이 고개 숙이겠노라고.


친절은 따뜻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를 조금씩 베어내는, 아픈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그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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