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진 이름 위에, 다시 욕망을 쓴다

by선비천사

서른두 해 동안 나는 칠판 앞에 서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빈 교실에 남으면, 공중에 부유하는 하얀 분필 가루가 마치 내 삶의 부스러기처럼 보였다. 교육자는 그래야 한다고 믿으며, 나는 부지런히 나를 지웠다. 퇴근길, 동료가 “방 선생, 성과급 등급 확인해 봤어? 너무 양보만 하는 거 아냐?”라며 툭 던진 말에도 그저 허허 웃어넘겼다. 그날 밤 나는 일기장에 ‘무욕의 평온’이라 적었다. 사실은 도피였다. 갈등을 감내할 용기가 없어 선택한 비겁한 평화였다.


명예퇴직 후,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바닥이 꺼진 듯한 공허가 나를 집어삼켰다. 평생 남을 위해 길을 터주었건만, 정작 길 끝에 홀로 남겨진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소리 없이 찾아온 우울은 나를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뜨렸다. 칠판은 깨끗이 닦였는데, 정작 그 위에 새로 써넣을 내 이름 석 자가 없었다. 나는 착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내 안의 엔진을 스스로 꺼버린 채, 서서히 녹슬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한 명의 얼굴이 나를 흔들었다. 교직 생활 내내 ‘욕심 많다’고 손가락질받던 옛 동료였다. 그는 자신의 성과를 알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기어이 교장 자리에 올랐다. 동료들은 그의 독기 서린 눈빛을 보며 혀를 찼지만, 퇴직 후 만난 그의 눈은 여전히 청년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그는 과거를 반추하며 침잠하는 대신, 새로운 목표를 향해 또다시 돌진하고 있었다.


그를 보며 깨달았다. 그가 가졌던 것은 천박한 탐욕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한순간도 방치하지 않겠다는 ‘생의 살기(殺氣)’였다는 것을. 나는 양보 뒤에 숨었고, 그것을 겸손이라 부르고 있었다. 굽은 등에는 날개가 살지 못한다. 내 등이 굽은 것은 세월의 무게 때문이 아니라, 무언가를 간절히 갈구하는 의지가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요즘 나는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세수도 하기 전 휴대폰을 켜고 전날 올린 글의 조회수를 확인한다. ‘37’. 누군가에게는 초라한 숫자겠지만, 나에게는 심장을 뛰게 하는 날 것의 전율이다. 어떻게 하면 내 목소리를 더 선명하게 남길 수 있을까. 그 고민이 나를 살린다. 나는 이제 그것을 ‘목표’라고 근사하게 부르지 않는다. 그냥 욕망이다. 나 역시 사랑할 때조차 상대의 마음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어 했던 그 뜨거운 갈증을 이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나의 탐욕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시를 쓰고 소설을 쓰며 세상의 중심에 서고 싶어 하는 이 갈망이 나를 다시 칠판 앞으로 불러 세운다. 이번에 내가 쓸 글자는 타인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오직 나만이 완성할 수 있는 내 이름의 연대기다.


지워진 이름 위에 다시 쓴다. 욕망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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