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골산의 흙먼지와 32년 교단, 그 사다리에서 내려오며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은 좀처럼 죽지 않는다. 총알은 기적처럼 비껴가고, 벼랑 끝에 매달린 손가락은 기어이 바위틈을 찾아낸다. 무협지 속 주인공은 수천 명을 베어 넘기면서도 결연한 눈빛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마지막 고지에 선다. 우리는 그 불사(不死)의 서사에 안도하며 대리 만족을 느끼지만, 그것은 삶의 진실과는 거리가 먼 매끈한 외피일 뿐이다. 현실의 우리는 누구나 가장 먼저 죽는 시나리오 속에 살며, 그때서야 비로소 인간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의 유년은 강화도 학골산 자락의 흙먼지 속에 있었다. 나는 그 골목의 ‘꼬마 대장’이었다. 실력이나 용기 덕분이 아니었다. 그저 남들보다 한두 살 먼저 태어났다는 우연이 나에게 대장이라는 완장을 채워주었다. 대장은 마땅히 아이들이 우러러보는 나무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 세상을 굽어살펴야 했다.
학골산 자락의 늙은 나무는 나에게 거대한 시험대였다. 다람쥐처럼 가벼운 동생들이 비웃듯 나무통을 타고 올라가 가지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내 차례였다. 나는 대장답게 엄숙한 표정으로 나무껍질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약했던 나의 팔근육은 금세 비명을 질렀고, 거친 나무껍질은 사정없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나는 한 번 더 손을 뻗어보려 했다. 하지만 나의 손가락은 나무가 아니라 위태로운 내 체면에 매달려 있었다. 버티려 할수록 몸은 아래로 처졌고, 발끝은 허공에서 길을 잃고 파닥거렸다. “대장, 왜 안 올라와?” 위에서 들려오는 천진난만한 물음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결국 나는 채 일 미터도 오르지 못한 채 미끄러졌다. 툭, 하고 처박혔을 때 입안으로 들어온 흙먼지는 눈물이 날 만큼 썼다. 그날, 나무 위 아이들의 웃음소리 아래서 '꼬마 대장'이라는 주인공은 가장 먼저 죽었다. 체면이 벗겨진 자리엔 나무 하나 오르지 못한 소년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렀다. 나는 서른두 해 동안 학교에서 슬롯를 가르쳤다. 교실이라는 무대에서 나는 늘 주인공이었다. 교단이라는 한 뼘의 높이는 나를 실제보다 더 현명하고 정의로운 사람으로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때로 내가 틀린 말을 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훈계를 늘어놓아도, 학생들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 침묵이 나의 권위인 줄 알았고, 그 시선들이 나의 실력인 줄 알았다.
하지만 퇴직의 문턱을 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나를 그 자리에 있게 한 것은 나의 탁월함이 아니라, ‘제도’가 짜놓은 견고한 사다리였다는 것을. 내가 벗어놓은 교사라는 완장은 사실 학골산에서 오르지 못했던 그 나뭇가지와 다를 바 없었다. 사다리 위에 올라앉아 있을 때 사람들은 자신이 공중에 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사다리가 치워지는 순간, 우리는 다시 흙먼지 풀풀 날리는 바닥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가냘픈 존재들이다. 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강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극은 그 바람을 자신의 날갯짓이라 믿는 오만에서 시작된다.
나는 이제 기꺼이 '가장 먼저 죽는 주인공'이 되기로 했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대장이어야 한다는 체면을 스스로 파괴한다. 학골산 나무 아래서 흙을 씹던 그 소년의 부끄러움을 이제야 온전히 껴안는다. 높은 가지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바닥에 누우니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밟힌 낙엽의 결, 흙 속을 기어가는 개미들. 낮은 곳에 엎드린 자들만이 공유하는 고요한 평화가 거기 있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나무 위로 기어오르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나무 아래로 떨어져 부서진 조각들을 줍는 일이다. 나의 수필은 그 패배의 기록이자, 정직한 추락의 증언이다. 주인공이 먼저 죽어야 비로소 인간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웅이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한 명의 '사람'이 서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소래산 자락을 걸으며 강화의 학골산을 떠올린다. 내 안의 완고한 대장을 하나씩 죽여 나간다. 나는 이제 주인공이 먼저 죽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거기엔 거짓 승리 대신 진실한 통곡이 있고, 오만한 왕관 대신 소박한 흙냄새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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