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본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 민들레와 소년

by선비천사

봄은 늘 소리 없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계절이 바뀌는 정확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어느 날 문득, 바람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차갑기만 하던 공기 속에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스며들고, 그때서야 비로소 세상은 아주 조금씩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하천 둔덕 위, 누구도 일부러 찾지 않는 자리에 민들레 하나가 피어 있었다. 그곳은 발걸음보다 바람이 더 자주 머무는 자리였다. 아이들의 웃음도, 어른들의 대화도 스쳐 가지 않는 곳. 대신 보이지 않는 것들이 지나갔다. 흩어진 생각들, 닿지 못한 말들, 그리고 끝내 전해지지 못한 마음들.


민들레는 그것들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바람이 남기고 간 것들을 받아들이며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꽃은 조용히 피어났고, 조용히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스스로 알고 있었다. 피어나는 순간부터, 언젠가는 흩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 가야 해.”


어느 날, 바람이 말했다. 민들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꽃이 마르고, 중심이 가벼워지자 씨앗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없이 많은 작은 존재들. 각자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모두 바람에 맡겨진 것들이었다.


그날, 바람은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씨앗들은 하늘로 떠올랐다. 그중 하나가 있었다.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멀리 날아간 씨앗. 그 씨앗은 도시를 넘어, 길을 스치고, 오래된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 골목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오래 머물지 않는 곳처럼 느껴졌다. 그 끝에 낡은 집 하나가 있었다. 벽은 갈라져 있었고, 창문은 바람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창가에는 늘 빛이 머물렀다. 씨앗은 그 자리 아래에 내려앉았다.


겨울이 지나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 하지만 그 시간은 사라지는 시간이 아니라, 안으로 쌓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 왔다.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 시작된 변화가 흙을 밀어 올렸다. 연약한 줄기가 모습을 드러내고, 마침내 노란 꽃이 피어났다. 그 집에는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소년은 조용한 아이였다. 무언가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기색도 거의 없었고, 무엇에 깊이 머무는 일도 드물었다. 하루는 반복되었고, 감정은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과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날도 그는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멈췄다.


“… 꽃이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날 이후, 소년은 매일 그 자리에 잠시 머물렀다. 꽃을 바라보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지나치지 않고 한 번 더 보는 것. 그 반복은 느리게, 그러나 분명하게 쌓여갔다.


민들레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보여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오래 남는 일인지. 시간이 흘렀다. 다시 떠날 날이 다가왔다.


“나는 남고 싶어.”


민들레가 처음으로 말했다. 바람은 잠시 머물렀다.


“너는 남는 존재가 아니야.” 그리고 조용히 덧붙였다. “대신, 남기고 가는 존재지.”


그날 밤, 씨앗들이 다시 떠올랐다. 소년은 창가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흩어지는 것들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하나의 씨앗이, 그 손 위에 내려앉았다. 아주 가벼운 감촉.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무게.


소년이 물었다. “왜 나한테 온 거야?”


작은 떨림이 전해졌다. “너는 나를 바라봤으니까.”


소년의 눈이 흔들렸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잠시의 침묵. 그리고 아주 조용한 대답.


"누군가를 바라본 시간은, 사라지지 않거든.”


소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단지 바라봤을 뿐이었다. 붙잡지도 않았고, 바꾸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무언가는 남아 있었다.


소년의 손이 천천히 풀렸다. 씨앗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더 높이, 더 멀리. 그리고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소년은 처음으로 알았다. 자신이 단 한 번도 혼자였던 적이 없다는 것을.


시간이 흘렀다. 소년은 자라났고, 그 집을 떠나는 날이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창문을 열었다. 익숙한 바람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아래, 다시 하나의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내가 기억할게.”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남는 것은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를 끝까지 바라본 시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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