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 속으로 쏙 들어가기

by석은별


남편과 말을 하지 않은 지 2주 가까이 되었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다.

더 이상 상대방의 기준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뒤로 입을 닫았다. 필요한 말 외에는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았고 설명하지 않았다. 상대의 표정을 읽으려고 하지도 않았다.

처음 며칠은 이것이 냉전이라고 생각했다.

부부가 한집에서 말을 하지 않고 지내는 일이 좋은 일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고, 서로의 입장을 확인해야 하고, 관계를 풀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편했다.

생각보다 너무 편했다.

집 안이 조용해서가 아니었다.

내 안이 조용했다.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나를 이해시키기 위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고,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그제야 알았다.

사람과 말을 나눈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었다.

특히 오래된 관계에서는 말 하나가 말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

그동안 쌓인 기억이 따라오고, 말투가 붙고, 표정이 붙는다. 예전에 들었던 말이 소환되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한다. 상대가 던진 문장 하나를 받아들고 내 안에서는 수십 개의 문장이 만들어졌다.

그 일을 하지 않자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남편과 멀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에게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사이 생일이 있었다.

남편이 마트에서 음식을 사 왔다.

생일이니까 먹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밤새 토했다.

아들도 설사를 했다고 하니 음식에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밤새 몸이 먹은 것을 밀어내는 동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몸이 거부하고 있구나.

그 생각이 우스워서 피식 웃었던 것도 같다.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미를 붙일 필요는 없다. 음식이 상했을 수도 있고 단순히 내 위장이 예민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날의 나는 그렇게 느꼈다.

받아들이기 싫은 것을 몸이 기어이 밖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밤새 그렇게 앓고 다음 날 아침 집을 나섰다.

그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일정이 꽉 차 있었다.

초등학교 교육이 첫 일정이었다.

운전하면서도 걱정했다.

이 몸으로 오늘 하루를 어떻게 버티지.

그런데 학교에 도착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몸이 달라졌다.

아이들 앞에 서자 목소리가 나왔다.

설명하고, 질문하고, 아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교육을 마치고 이동했다.


사람들을 만났다.

상담을 하고 또 이동했다.

밤까지 일정을 소화했다. 드물게 일이 몰린 날이라 아침부터 밤까지 열두 시간을 버틴 셈이다.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아픈 몸이 잠시 나를 놓아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를 끝내고 나니 비로소 몸이 다시 무거워졌다.


낮에 만난 동료가 전날 밤새 아팠다는 이야기에 죽을 사주었다.

밤 10시가 다 되어 집에 도착해서 아들에게 죽 가방을 건네며 세수하고 나올 동안 좀 꺼내 달라고 했다.

아들은 투덜거렸다. 기타를 들고 있으면서 “자려고 했는데...”라며 귀찮아하길래 말했다.


“엄마 오늘 아무것도 못 먹고 12시간 일하다가 들어오는 거야. 이것도 아는 선생님이 집에 가서 먹으라고 사준 건데... 좀 차려주면 안 돼?”


아들은 다시 “이게 뭐 어렵다고...”


옥신각신하는 소리에 잠들어 있던 남편은 시끄럽다며 욕을 했다.


“씨팔... 조용히 좀 해라!”


서러움이 밀려왔다.

아들도 남편도 다 밉고 내가 왜 사나 싶었다.


잠깐 지나가는 말에도 동료는 내가 아팠다는 것을 기억해 죽을 사주었다.

그런데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 죽 한 그릇을 먹는 일이 서러웠다.

그 순간만큼은 내 인생이 참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싸우고 싶지는 않았다.

왜 그런 말을 했느냐고 따지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설명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것이 전과 달랐다.


예전의 나라면 내가 얼마나 아팠고,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냈는지 설명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이 왜 상처였는지 알아주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제대로 미안해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남편은 미안하다고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화를 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를 벌주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 순간 문득 알았다.

내가 지난 2주 동안 하고 있었던 일이 무엇인지.

나는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내 에너지를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관계가 힘들 때마다 나는 관계를 들여다보았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 생각했다.

상대는 왜 저러는지 생각하고, 나는 왜 이렇게 반응하는지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고,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여야 하는지 생각했다.

때로는 화를 냈고 때로는 참았다.

이해하기도 했고 이해받고 싶어 하기도 했다.

어쨌든 시선은 늘 관계를 향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질문이 달라졌다.

‘이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지?’

가 아니라

‘나는 어디로 가고 싶지?’

이상할 만큼 다른 질문이었다.

첫 번째 질문에는 남편이 필요했다.

그가 달라져야 했고, 내가 달라져야 했고, 둘이 무엇인가를 합의해야 했다.

두 번째 질문에는 남편이 필요하지 않았다.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만 알면 되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관계를 정리한다는 것은 반드시 관계를 끝내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관계가 내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다시 정하는 일일 수도 있다.

너무 큰 것은 조금 작게.

너무 가까운 것은 조금 멀리.

내 마음을 지나치게 흔드는 것은 닿을 수 있는 거리를 조금 줄여놓는 것.

나는 남편과 언어적인 교류를 줄였다.

그랬더니 정서적인 자극도 줄었다.

정서적인 자극이 줄자 생각이 줄었다.

생각이 줄자 이상할 만큼 많은 공간이 생겼다.

그 공간에 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

읽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

만들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

앞으로 살아보고 싶은 삶.

그것들이 하나씩 보였다.

나는 그동안 관계 하나를 붙들고 얼마나 많은 정신적 공간을 사용하고 있었던 걸까.

상대를 이해하는 데 사용했던 힘.

나를 이해시키는 데 사용했던 힘.

상처받는 데 사용했던 힘.

화내는 데 사용했던 힘.

다시 괜찮아지는 데 사용했던 힘.

그 힘들이 조금씩 나에게 돌아왔다.


남편과 앞으로 어떤 관계로 살아가게 될지는 아직 모른다.

예전처럼 돌아갈 수도 있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어쩌면 한집에서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적당한 거리를 가진 사람들이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결론을 내리고 싶지 않다.

결론보다 중요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나는 이제 그쪽을 보고 있다.

상대를 등지고 있다는 느낌도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도망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방향을 바꿨다.

그동안 너무 오래 관계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면 이제 몸을 돌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걷는다.

신기하게도 발걸음이 가볍다.


나는 이제 내 삶 속으로 쏙 들어가고 싶다.

남편의 아내로만 존재하지 않고,

아이들의 엄마로만 존재하지 않고,

누군가를 상담하고 교육하는 사람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 모든 역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보다 먼저

내 삶을 사는 한 사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까이 두고,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을 하고,

내가 선택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시간을 사용하면서.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하루가 흔들리지 않는 삶.

상대의 기분을 알아내느라 내 기분을 놓치지 않는 삶.

이해받기 위해 지나치게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삶.

그리고 필요하다면 사랑하는 사람과도 적당한 거리를 둘 수 있는 삶.

그런 곳으로 가고 싶다.


어쩌면 나는 이미 그곳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침묵이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에는 거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느라 조금 비켜 서 있었던 내 삶이 있다.

나는 이제 그 안으로 쏙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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