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나를 보고 있었구나

by석은별

불안은 생존의 본능이었다고 하는가.

나는 늘 내가 안전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온 감각을 다 쓰고 살아온 사람이다.

부모로부터 내려오는 기질적 특성에 더불어 여태 살아온 삶의 궤적을 쫓아가 보면, 큼지막한 트라우마 사건부터 사소한 일상의 긴장감 속에서 ‘여기는 안전한가. 이 사람은 안전한가?’를 무의식적으로 늘 탐색하던 나임을 발견한다.


‘괜찮다’는 말을 습관적으로 쓰고 있었지만, 그 말은 아무 일도 없어서 괜찮다거나 아무런 생각이나 감정이 들지 않아서 괜찮다는 것이 아니었다.

안전하니까 ‘괜찮아’라고 말한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현재의 시점에서 늘 과거의 나를 마주하면서 내 속에서 미처 돌보지 못한 여러 자아들을 만나는 연습을 해왔다.

거의 습관적으로 마음속 세상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는 이상한 감각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단지 마음속 세상에 관심만 기울였는데 편안해지는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건가?

하지만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언젠가 한의원에서 재어 보니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각성 상태였다고 했다.

그 당시 교통사고로 통원할 시점이니 각성된 게 당연하다지만, 어쩌면 교통사고가 아니더라도 나는 늘 각성 상태였는지도 모른다.

둘째를 임신하고서 갑상선 기능 저하증을 진단받았을 때도 자각하지는 못했겠지만 기질적으로 스트레스에 취약했을 거라는 의사의 말에 갸우뚱했다.


'내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나처럼 할 말 다 하고, 싫은 건 안 하는 사람이?'


하지만 내 몸에서는 여러 곳에서 이미 스트레스에 약하다는 신호가 자주 드러났다.

식사 중에도 조금만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 밤을 새워야 하는 토사곽란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거나,

힐링하자고 떠난 여행지에서 3박 4일을 꼬박 선잠으로 자다가 돌아와서는 몸살로 일주일을 고생한다거나,

단순한 결막염인 줄 알았는데 항상 눈에 실핏줄이 터져 보이는 것처럼 충혈되어 있는 눈은 그야말로 눈 떠 있는 순간에는 어떤 작은 단서도 놓칠 수 없다고 세상을 향해 부릅뜬 흔적이 아니었나 싶다.


지나온 삶의 나를 하나하나 만나며 내가 그 시절의 나를 안심시키면서 ‘괜찮다. 괜찮아졌어.’라고 위로하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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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명상 중에 갑작스럽게 빨려 들어가듯 어떤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며 온 감각이 그 화면 속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종종 그러한 경험을 하는데, 이건 능력도 무엇도 아니다.

순간적인 몰입이 이루어진 상태려니 여긴다.

그날의 나는 언젠가 꿈에서 본 적 있던 그 장면 속에서 다른 역할을 경험했다.


나는 꿈에서도 등장인물이 되기보다는 늘 관찰하는 입장이다.

대부분의 꿈 속에 내가 없다.

꿈에 등장하는 상황에 있는 인물들을 관찰하면서 누가 나인지 찾으려고 꿈을 꾸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그날의 나는 전쟁통 속에 누더기 옷을 입고 떡진 머리에 맨발로 서서 우는 여자아이였다.

전쟁 세대가 아닌 내가 전쟁 속 고아가 된 경험은 낯설었다.

건물이 무너지고 먼지가 자욱한데 주변에는 온통 잿빛으로 사람들이 쌓여 있거나 늘어져 있다.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계속 울었다.

내가 우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리지 않아서 더 크게 울어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꿈속의 나는 귀가 안 들리는 모양이다.


어떤 30대의 여성이 나에게 다가와서 무너진 담벼락에 손을 갖다 대니 나무문이 나타난다.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들어간다.

여성의 입 모양을 보니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전혀 들리지 않는다.

나는 ‘무서워요.’라고 말하며 우는데, 아무래도 그 여성의 귀에도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울음소리만 들리는 것 같다.


여성을 따라 들어간 곳은 낡은 시골집 부엌이었다.

분명 바깥은 전쟁통이었는데, 그 나무문을 통과하니 시대가 이동된 것인지 여성의 복장도 조선 후기 평민들의 생활복 차림이다.

여성은 그 시대에 맞지 않는 나의 누더기 원피스를 벗기면서 대야에 물을 섞어 나를 씻겨준다.


나는 그 순간 어린아이의 역할을 하면서도 알아챘다.

‘어! 이건 내가 오래전에 꿈에서 어떤 여자아이를 구해서 씻겨주던 그 꿈이었는데. 지금 나를 씻겨주는 저 사람이 나구나.’

그 순간 내 귀는 주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녀의 목소리와 내가 씻겨지는 모든 감각이 느껴졌다.

뜨거울까 봐 물 온도를 맞춰서 다정하게 씻겨주는 그 손길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겨우 6~7살 정도 아이였을 뿐인데 그 30대 여성에게 말했다.

“나는 참 다정한 사람이 되는가 봐.”

여성이 씩 웃는다.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게 그렇게 많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 별일 없이 잘 지내고 있어. 밤에 잠도 잘 자고, 낮에는 바느질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다 보면 하루가 금방 가지. 가끔 동네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주면서 산단다.”


여성의 말에

“나라서 고마워.”

라고 말하는 순간, 그 여성은 더 늙은 노인이 되어 인자한 표정으로 나에게 손을 내민다.


그리고는 말했다.

“무섭지. 어렵지. 도통 모르겠지. 하지만 결국에는 다 편안해진단다. 늘 그랬어. 아무도 해치지 않아. 갈기갈기 찢겨질 것같이 공포스럽지만 희한하게도 그런 순간마다 비켜간단다. 그러니 네 나이에 맞게 살아. 너무 똑똑하려고 하지 말고, 좀 어리숙하게 살아도 된단다.”


할머니 같은 사람에게도

“나라서 고마워.”

라고 말하는데 다시 전쟁통 속에 귀머거리 여자아이로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울지 않는다.

다시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주변을 살피면서 몸을 옮길 곳이 있는지 찾는다.

그리고 잿빛 배경 속에서 컬러빛의 강아지 꼬리가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돌아왔다.


한 장면을 그렇게 따라가는데 울컥 눈물이 났다.

‘나라서 고마워’라는 그 말은 지금의 내가 아닌 어린 시절의 내가 더 과거와 더 미래의 나를 보고서 건넨 말이었다.

여러 생을 살아내면서 늘 한결같이 결국에는 편안하게 살아가더라는 마지막의 모습을 보니 금은보화를 얻은 것만큼이나 부자가 된 심정이었다.


결국에는 그렇게 다정하고 인자한 사람이 되는구나.

그리고 과거의 나들은 앞으로 다가올 나를 기대하고 있구나.

지금의 나도 미래의 나를 기대하며 이미 정답을 봐버린 것처럼 그 과정을 의심 없이 가면 되겠구나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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