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 가고 싶니?

by석은별

어디서 왔는지, 언제부터 내 안에 있었는지 아무리 물어도 눈만 끔뻑였다.

망둥어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녀석은 나에게는 열지 말라던 그 문 쪽을 바라보았다.


내가 오랫동안 열어 보고 싶었던 문.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야만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장면을 보더라도 무너지지 않고 가만히 들여다볼 수 있는 단단한 사람이 되면,

그때는 비로소 문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조금 더 단단해지기를.

과거의 어느 장면을 만나더라도 피하지 않을 만큼 용감해지기를.

그 장면 속의 나를 보고도 미워하지 않을 만큼 자비로워지기를.

그런데 기다리는 일에도 지쳤다.

어쩌면 그 문 앞에 있는 게 익숙해진 것이지 그 문 너머를 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 문을 열지 않아도 되겠구나 마음먹은 후로 남편이 따라왔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몸보다 말이 나를 따라다녔다.

평소와 다름없이 밥을 먹는 자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꺼낸 이야기에서

“정확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왜 아는 척하냐!”라고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면

“너 밖에 나가서는 사람들과 대화 되는거 맞냐?”라고 한다거나

“너 한테 상담 받는 사람들이 참 불쌍하다 불쌍해.”라고 한다.

말을 섞지 않으면 조용할 것을 알기에 대답을 피하면

“왜 대답 안하냐?”라고 다그치고

어떤 대답을 하든 “니가 뭘 안다고? 너 무식한거 사람들도 알아?”라고 비아냥거린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이지만, 내 안에 괴물이 있듯 그를 휘감은 괴물이 내뿜는 소리라고 통역하며 살아왔다. 그 적응이 결국에는 남편의 괴물을 더 부풀린 격이 됐음을 망둥어를 통해 알고 난 이후 나는 멈췄다. 그와의 접촉을 최소화했고, 그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항 속 나의 망둥어를 떠올렸다. 어항으로 시선을 돌리면 망둥어는 씨익 웃으며 말하는 것 같았다.


‘제법인데?’


더 이상 자신이 나를 대신하지 않아도 되노라 엄지척하듯 지느러미를 흔들어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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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비난과 폭언이 내가 떠나온 자리를 종종걸음으로 쫓아왔다.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으려고 소매 끝을 붙드는 어린아이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민감한 사람.

내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것일까.

내가 더는 그를 해석하지 않는다는 것.

그가 화를 내도 달래지 않고, 오해해도 해명하지 않고, 자기 삶을 망친 사람이 나라고 말해도 그 말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것일까.


‘어린 아기 같네.’


그런 생각이 들다가 멈칫했다.

그를 아기로 보는 순간 나는 다시 그의 엄마가 된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의 비난 속에 숨은 상처를 찾아내고, 폭언을 서툰 구조 요청으로 해석하게 된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다.


남편이 하는 말과 남편 속의 괴물이 하는 말을 구분했다.

“저건 본심이 아니야.”

“일이 힘들어서 그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래.”

아이들에게도 설명했다.


아빠의 말이 너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아빠 안의 힘든 무언가가 튀어나온 것이라고.

아빠가 원래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그렇게 남편과 아이들 사이에 서서 그의 말을 통역하고 또 통역했다. 남편의 말과 행동을 동시통역하는 기술이 늘어날수록 그것이 아이들을 지키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어쩌면 실제로 얼마간은 지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나는 점점 남편의 아내가 아니라 통역자가 되었다. 그가 자기 입으로 내뱉은 말의 의미를 내가 대신 정리했고, 그가 감당해야 할 결과를 내가 먼저 수습했다.


괴물은 비유였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낸 사람은 남편이었다.


이제야 그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인다.

종종걸음은 아기의 것처럼 보여도, 비난과 폭언을 던지는 사람은 어른이다.


그의 괴물을 길들이는 일은 내 몫이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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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래전부터 궁금했다.

우리는 도대체 어떤 인연이기에 이토록 얽혀 있는 걸까.

전생에서 갚지 못한 빚이라도 있었던 걸까.

서로에게 끝내 마쳐야 할 과업이 남아 있었던 걸까.

왜 하필 이 지구별에서 부부로 만나 이렇게 오랫동안 서로의 삶에 박혀 있었을까.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남편이라는 사람이 내 삶에 배치되어야만 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견딘 세월에도 어떤 장엄한 이유가 생기는 것 같았다.


남편을 만나야 지금의 두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사랑과 힘을 발견했다.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났고, 아이들이 맞을 충격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앞을 막아섰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남편은 다시 운명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나를 힘들게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내 삶의 과업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만나야 했던 사람이 되었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그를 떠나지 못했다.

아직 과업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아직 그가 자기 괴물을 직면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까.

아직 이 관계의 의미를 다 알아내지 못했으니까.


누군가 내게 물었다.

“만약 이 관계에 아무런 우주적 의미도 없었다면, 무엇을 가장 애도해야 할까?”


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남편을 애도해야 하나.

함께 늙어 갈 것이라 믿었던 미래를 애도해야 하나.

아이들과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던 꿈을 애도해야 하나.

한참 뒤에야 한 단어가 떠올랐다.


세월.


내가 남편과 지내 온 세월.

그러나 세월은 숫자로만 흘러가지 않았다.

언젠가 그가 달라질 것이라고 기다린 날들.

내가 조금만 더 현명해지면 큰 싸움을 막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날들.

그의 말과 괴물의 음성을 분리하며 스스로를 달랬던 날들.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만,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만,

내가 혼자 설 수 있을 때까지만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던 날들.


그 세월 속에는 언제나 조금만 더 기다리면 무언가 밝혀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과거의 내가 말했다.

“조금만 더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무엇을?”

“우리가 왜 만났는지.”

“그걸 알면 무엇이 달라지는데?”

“내가 견딘 이유가 생기잖아.”

나는 그 대답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견딘 이유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내가 겪은 일들이 어떤 성장과 깨달음을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믿어야 그 세월을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의미는 때때로 남은 삶을 담보로 요구했다.


이만큼 기다렸으니 조금만 더.

여기까지 이해했으니 끝까지.

그의 괴물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냈으니, 언젠가 그 괴물이 사라지는 모습까지.

그렇게 지나간 세월은 자꾸 앞으로의 세월까지 붙잡았다.




어쩌면 문 너머에서 울부짖던 것은 괴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남편과 살아온 세월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세월이 문고리를 붙잡고 나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이 안을 끝까지 들여다봐야 한다고.

이유를 알아내야 한다고.

그래야 네가 살아온 시간이 헛되지 않다고.


나는 문 앞에 서서 손잡이를 바라보았다.

문 너머에는 아직도 끔찍한 장면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을까.

아니면 이미 다 타고 남은 똬리의 흔적만 있을까.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확인한다고 해서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때의 나도, 아이들이 지나온 시간도, 남편이 뱉은 말이 닿기 전의 고요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세월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안에서 아이들을 사랑했고, 일했고, 공부했고, 사람들의 마음을 만났다. 내 손으로 생활을 일으켰고, 넘어질 때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시 섰다. 웃었던 날도 있었고, 함께 밥을 먹고 길을 나서며 평범한 행복을 느낀 순간도 있었다.


그 시간 속의 나까지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잘 자란 것은 아니다.

아이들은 그 세월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내가 견딘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도 아니다.

남편을 만나야 지금의 두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던 것과 그 뒤의 모든 고통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나는 남편 때문에 좋은 엄마가 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썼다.

완벽하게 지켜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빠의 말이 아이들에게 닿을 때마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 사이의 공기를 읽었을 것이다. 내가 괴물의 목소리를 아무리 통역해도 이미 알아들은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도 이제 부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언젠가 아이들이 그때의 마음을 꺼내 놓는다면 설명부터 하지 않고 말해 주고 싶다.


“네가 불편했던 것이 맞아.”

“엄마가 다 막아 주지는 못했어.”

“그래도 그건 네 바카라임이 아니야.”

그 말을 할 수 있는 엄마로 살아가는 것.


아이들 때문에 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사랑하면서도 나를 버리지 않는 것.

어쩌면 내가 앞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지도 모른다.

.

.

.

나는 모든 장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했다.

어떤 기억이 나타나도 눈을 돌리지 않고,

그 안의 나를 받아들이고,

마침내 아무렇지 않게 돌아설 수 있는 사람.

그 정도는 되어야 치유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험을 치르지 않으려고 한다.

더 강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

모든 기억을 복원하지 않아도 나는 무엇이 있었는지 안다.

그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안다.

그 안에서 내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지 못했는지도 어렴풋이 안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보지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다.


그 장면에 오늘의 관심을 주지 않기로.

지나간 세월이 앞으로의 시간을 더 가져가게 두지 않기로.


문을 영원히 없애겠다고 장담할 필요도 없다.

문은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가끔은 손잡이가 눈에 들어올 것이고,

어떤 날은 다시 열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은 열지 않는다.

.

.

.

앞으로의 삶이 언제나 아름다울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혼자 내리는 결정이 버거운 날도 있을 것이고, 자유보다 적막이 먼저 밀려오는 밤도 있을 것이다. 오래된 습관처럼 누군가에게 해명할 말을 준비하다가, 이제는 아무도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릴 때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각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안다.

누구의 기분도 살피지 않고 천천히 마시는 차.

아무 설명 없이 내가 선택한 길로 운전하는 일.

집 안이 조용한데도 불안해하지 않는 저녁.

돈을 쓰고도 모욕당하지 않는 일.

잠들기 전 내일 누가 화를 낼지 예상하지 않아도 되는 밤.

내가 말한 것을 누군가 왜곡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그저 시원하다고 느끼는 몸.

그것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어서 떠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감각이 하나도 오지 않는 날에도, 나는 다시 익숙함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내가 견딘 세월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

그저 살아 있는 몸이 우연히 만나게 될 감각이다.

나는 이제 그 우연을 경험하고 싶다.




어항 한구석에 있던 망둥어가 몸을 움직였다.

녀석은 여전히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문고리에서 눈을 떼고 어항 가까이 다가갔다.

“너는 어디서 왔니?”

지난번과 같은 질문을 해 보았다.

망둥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질문을 바꾸었다.


“그럼, 어디로 가고 싶니?”


녀석은 눈을 끔뻑였다.

그리고 문 반대편,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쪽을 향해 작게 몸을 틀었다.

나도 그쪽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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