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어디서 왔니?

by석은별


손바닥만 한 망둥어가 된 괴물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보다 훨씬 컸다.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내 뒤에 숨어 있다가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던 놈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항 한구석에서 눈을 끔뻑이며 팔딱거리고 있다.

우습다.

고작 저만한 놈에게 그렇게 오랫동안 휘둘렸나 싶다가도, 괜히 방심했다가는 다시 집채만 해질 것 같아 눈을 떼지 않았다.

없애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전처럼 잘 달래 재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냥 궁금해졌다.

‘너는 도대체 어디서 왔니? 언제부터 있었던 거니?’

망둥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녀석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집에 들어가기 싫어 작은 교회에 숨어 있던 아이가 있었다.

술을 마신 아버지의 고함이 들리고 동생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그 아이는 다시 교회로 도망갔다. 아무도 없는 강대상 아래 몸을 숨기고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내게 강 같은 평화.’


평화롭지 않은 아이가 평화를 노래했다.

무서운데 무섭다고 소리칠 수 없었고, 화가 나는데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울면 더 큰 소리가 날 것 같았고, 따지면 더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노래를 불렀다.

괜찮아질 때까지.

아니, 괜찮은 척할 수 있을 때까지.

지금 생각하면 참 기특한 아이였다.

숨을 곳을 찾았고, 노래를 찾았고, 견딜 방법을 찾아냈으니까.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 선택했던 그 방법에는 작은 대가가 붙어 있었다.

무서움은 어디로 갔을까.

분노는?

억울함은?

‘왜 나한테 이러는데.’

‘나도 싫어.’

‘그만해.’

‘무서워.’

‘나 좀 봐줘.’

그 말들은 한 번도 제대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

.

.

기다리는 아이도 있었다.

연락이 올지 오지 않을지 알 수 없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

오늘일까.

내일일까.

이번에는 정말 올까.


기다리는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것은 어쩌면 이별보다 희망인지도 모른다.

안 온다고 확실히 말해주면 포기라도 할 텐데, 올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사람을 그 자리에 붙잡아둔다.

나는 그렇게 생모를 기다렸다.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다시 기대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아니, 나는 기다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는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괜찮아.’

‘별로 기대 안 했어.’

‘원래 사람은 혼자 사는 거야.’

‘누구한테 기대해서 뭐 해.’


말은 점점 단단해졌다.

그 단단한 말 뒤에서 아이는 여전히 문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래서였을까.

수십 년이 지나 딸의 휴대전화에서 답이 오지 않는 몇 시간이 그 오래된 아이에게는 몇 시간이 아니었다.

현재의 나는 알고 있었다.

딸은 바빴다.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나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망둥어는 달랐다.

“것 봐.”

그놈은 아주 오래전부터 이 말을 좋아했다.

“것 봐. 결국 안 오잖아.”

“것 봐. 또 기다리잖아.”

“것 봐. 기대한 네가 바보잖아.”


그래서 기다리는 아이가 울기도 전에 괴물이 먼저 화를 냈던 모양이다.

서운하다고 말하면 너무 약해 보이니까.

보고 싶다고 말하면 또 기다려야 하니까.

무섭다고 말하면 정말 버려질 것 같으니까.

차라리 화를 내버리는 것이다.

먼저 밀쳐내고, 먼저 비난하고, 먼저 관계를 망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버려진 사람은 되지 않을 테니까.

나는 한참 동안 망둥어를 보았다.


‘HA, 꽤 오래 일했구나.’




괴물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늘 확신에 차 있었다.

“넌 또 실패할 거야.”

“저 사람은 너를 무시하는 거야.”

“기대하지 마.”

“만만하게 보이면 안 돼.”

“끝까지 참으면 네가 바보야.”

“먼저 당하지 마.”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들이었다.

그중에는 아버지의 목소리도 있었고,

남편의 목소리도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내 목소리도 있었다.

남편의 비아냥거림과 조롱이 시작되면 맞서 싸우거나, 입을 닫거나, 멀리 떨어지는 수밖에 없다고 느끼던 날들이 있었다. 실제로 가족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종종 말을 멈추거나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때 삼킨 말들은 어디로 갔을까.

화를 내지 않았다고 화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꾸하지 않았다고 할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는 관계를 깨지 않기 위해 수없이 말을 꿀꺽 삼켰고,

내가 더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수없이 분노를 접었다.

괜찮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이들 앞에서는 지혜로운 엄마이고 싶었고,

남편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런 마음들은 곤란했다.


미워 죽겠다는 마음.

복수하고 싶은 마음.

상대가 나만큼 아팠으면 좋겠다는 마음.

잘못되었으면 좋겠다고 스쳐 지나가는 마음.

나도 소리 지르고 싶고,

나도 저주하고 싶고,

나도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이 올라오면 얼른 숨기려 했다.

HA는 그런 마음을 야금야금 먹고 자라서 괴물이 된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밀어낼 때마다, 괴물의 몸집은 커져갔다.

.

.

.

칼 융의 그림자라는 말을 처음 배웠을 때는 이해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는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밀어낸 것들이 머무는 자리.

뼈를 깎는 노력으로 내 그림자도 꽤 많이 들여다봤다고 생각했다.

참 건방졌다.

그림자는 바카라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가장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

‘나는 절대로 저런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하는 순간,

가장 혐오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순간,

그 뒤에서 슬쩍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친구에게서 낯선 욕망을 보았을 때 내가 그렇게 아팠던 것도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어떻게 네가 내 불행을 바랄 수 있어?’

그 눈빛을 견디기 힘들었던 이유.


며칠 뒤 딸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내 눈에서 똑같은 눈빛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순간 그림자는 더 이상 이론이 아니었다.

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 머릿속의 생각은 참 말이 많다. 문제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가 아니었다.

그 생각의 목소리가 너무 커져서 마치 지배자처럼 내 행동까지 결정하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버려질 거야.” 생각이 말했다.

그러면 나는 버려지지 않기 위해 공격했다.


“무시당하고 있어.” 생각이 말했다.

그러면 나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더 큰 목소리를 냈다.

“참으면 네가 지는 거야.” 생각이 말했다.

그러면 나는 이기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냈다.

괴물이 집채만 했을 때는 그 목소리가 곧 나였다.


“버려졌어.”

그러면 나는 버려진 사람이었다.

“무시당했어.”

그러면 나는 무시당한 사람이었다.

“화를 내.”

그러면 화를 내야 했다.

그런데 괴물이 망둥어로 변하고 나니 이상하게 들린다.

“버려졌어!”

조그만 망둥어가 어항 속에서 외친다.

“그래?”

“무시당했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당장 화내!”

“싫은데.”

망둥어가 팔딱거린다.

조금 웃음이 났다.

전에는 신의 계시처럼 들리던 말들이 이제는 어항 속에서 삐죽대는 작은 생물의 고함처럼 들린다.


아(A)...

목소리가 없어진 것이 아니구나.

내가 그 목소리와 조금 떨어진 것이구나.

.

.

.

그러고 보니 괴물은 나를 망치기 위해 태어난 것만은 아니었다.


무서워도 도망칠 수 없던 아이 대신 무서움을 품었고,

기다리다 지친 아이 대신 기대하지 않는 법을 만들었고,

화를 낼 수 없던 아이 대신 분노를 모았고,

말을 삼켜야 했던 어른 대신 저주의 문장까지 저장해두었다.


나를 지키겠다고.


아주 이상하고 서툰 방법으로.

그러다 너무 커져버린 것이다.

경비원이 왕이 되어버린 것처럼.

나를 보호하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괴물을 없애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다시 운전대를 맡길 생각도 없다.

녀석이 소리를 지르면 들어는 볼 것이다.

‘무슨 일이야?’

‘또 뭐가 그렇게 무서운데?’

‘이번에는 누구를 기다리고 있니?’

이제 결정은 내가 할 것이다.

망둥어가 아니라.



문득 오래된 문이 떠올랐다.

그 앞에서 나는 오랫동안 무언가를 두려워했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HA.

이름도 아닌 이상한 소리를 붙여놓고 그 존재를 무서워했다.

혹시 문을 열면 감당할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올까 봐.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완전히 무너져버릴까 봐.


그런데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내는 일보다,

“나는 왜 그 문 앞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떨고 있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제 내 옆에는 작은 어항 하나가 생겼다.

그 속에서 망둥어가 팔딱거린다.

“열지 마.”

망둥어가 말했다.


나는 문을 바라보았다.

아직 열지는 않았다.

대신 물었다.


‘왜?’

망둥어는 가만히 눈만 마주치고 있다.


이상하게도 편안하다.

이제 저 문 앞에서 떨리지 않는다.

이상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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