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포함해서 하루 9시간씩 진행되는 연수를 4일 연속으로 들었다.
예전에는 일주일씩 숙박연수를 받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이번 연수는 더 피곤했다. 접촉은 훨씬 적은데 각자의 공간에서 화면으로만 연결되어 있는 관계가 현실에서 사람을 직접 만나는 것보다 더 피로하게 느껴졌다.
뇌과학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한다. 인간은 원래 화면 속 얼굴을 그렇게 오래 상대하도록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니까. 이해한다고 해서 그 피로감이 줄어드는 건 또 아니다.
이번 연수는 주말까지 이어졌다.
겨우 10분 쉬는 시간이 생겨 문밖으로 나왔는데 남편과 아들이 각각 화장실 하나씩 차지하고 있었다. 한 명은 큰 볼일, 한 명은 샤워 중이었다.
“나 연수 중이라고 했잖아. 쉬는 시간에는 화장실 하나 정도는 비워줘.”
만만한 아들에게 재촉하듯 말했지만 이후 쉬는 시간마다 신기할 정도로 두 사람이 또 각각 화장실을 차지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불쾌했다.
겨우 숨 돌리려고 나온 시간인데 집 안의 생활 소음과 사람들의 동선이 온몸을 긁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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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가 끝나고 연휴가 하루 더 남아 있었다.
푹 자고 싶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두 남자가 티격태격거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어디 아빠한테 그런 말을 하고!”
남편의 볼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벌떡 일어나려던 내가 멈칫했다.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듯 반응하는 내 몸이 안쓰러웠다.
여전히 내 마음속 어떤 아이는 남편의 심기를 살피고 눈치를 보며, 먼 옛날 아빠가 감정적으로 밥상을 뒤엎던 장면을 떠올린다.
사실 결혼생활 24년 동안 남편이 밥상을 뒤엎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이 얼마나 현실은 안전한가.
다만 밥상머리에서 불편한 심기로 나와 아이들을 질리게 만든 적은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내 환상 속에서는 갑자기 밥상이 뒤엎어지고 난장판이 되는 장면이 자동으로 소환된다.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아빠가 내게는 어떤 말도 행동도 하지 않을 걸 안다.
하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새엄마와 어린 동생들이 맞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너무 끔찍했다.
차라리 내가 맞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맞아야만 폭력이 아니다.
맞는 장면을 두 눈 똑똑히 바라보게 만드는 그 이상한 배려가 어쩌면 더 폭력적 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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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이야. 이건 나와는 상관없어.”
나는 떨리는 아이의 어깨를 만지듯 내 어깨와 팔뚝을 천천히 주물렀다.
그리고 다시 베개를 고쳐 눕고 중얼거렸다.
“저런 소리는 정말 싫어. 그런데 그때 석 OO(아빠이름)이는 죽었어. 지금은 남편이랑 아들이 자기들끼리 다투는 거야. 무슨 일 생기면 OO이가 와서 알려주겠지. 늘 그랬으니까.”
나는 나에게 말을 건넸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 아이를 떠올리며 한참 어깨를 만지작거렸다.
내가 터득한 나를 안심시키는 방법이다.
다시 잠들었는지 눈을 떠보니 거의 두 시간을 잤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11시도 되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올해 들어 그렇게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다.
평일이면 새벽 5시 50분쯤 저절로 눈이 떠지고 늦어도 6시 20분 알람에는 일어나야 했다.
토요일도 출근하던 날들이 많았고, 일요일이면 몸이 먼저 평일처럼 깨어났다.
예전에 ‘또자’, ‘잠꾸러기’, ‘잠팅이’ 같은 별명이 있었다는 게 무색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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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방이 닫혀있다. 노크를 하고 들어가 아침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내가 LG 경기를 보고 있었거든.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왜 너는 이긴 장면만 보냐'라고 하는 거야. 내가 골라서 보는 게 아니라, 전날 경기 하이라이트가 그런 것들만 올라와 있는 건데 내가 골라 본다고 하잖아. 그래서 '하이라이트거든!'하니까 삼성에 누가 실바카라을 했니, LG선수 누가 이랬니 저랬니 하는 거야. 그러면서 LG가 어쩌고저쩌고 하는데 아빠가 또 자기 맘대로 막 디스하는 거야. 인간이 안 됐니 어쩌니라고 까지 하잖아.”
아들의 말을 끊지 않으니 계속 쏟아진다.
“그래서 '아빠나 인간이 돼라'고 했지. 그러니까 자기가 무슨 인간이 아니냐고, 너는 인간이 아닌 데서 태어났냐고 막 그러잖아. 남한테 인간이 됐니 안 됐니 하는 거는 맞냐고. 왜 가만히 보는 사람한테 끼어들어서 시비 터냐고 했지. 그러니까 자기가 자식한테 별소리 다 듣는다면서 막 그러잖아. 아빠 좀 이상해. 정병 같아. 자기 기분 따라서 막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 진짜 짜증 나”
나는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다 들었다.
“그래서 방문 닫고 있었던 거야?”
“응.”
“잘했네.”
그러다 문득 물었다.
“근데 너 아빠한테 정병 같다고도 했어?”
“아니~ 내가 그런 먹이를 왜 줘. 아빤 아무거나 막 주워 먹기 땜에 내가 그런 건 또 잘 알지.”
웃음이 났다.
“잘했네. 그래도 우리 중엔 니가 제일 낫다. 쉬어.”
하소연을 다 털어내서인지 아들은 금세 장난을 치며 재미있는 쇼츠를 같이 보자고 했다.
나는 몇 개를 같이 보며 맞장구를 치다가 방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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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OO이가 또 내 욕하지?”
남편이 눈치를 보며 물었다.
“아 몰라.”
“아니 아들이 아빠한테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
남편은 계속 말을 쏟아냈다.
“내가 얼마나 만만하면... 니가 평소에 애들한테 아빠를 얼마나 우습게 해 놨으면...”
"..."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대응하는 순간 그다음은 늘 패턴대로 흘러간다.
그렇다고 대응하지 않아도 결국 패턴대로 흘러가긴 한다.
다만 감정적인 상태가 되면 꽤 단순해지는 사람이기에 나는 대응하지 않는 방법을 택한다.
그리고 남편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다.
지나고 나면 늘 남는 건 내용보다 정서뿐이다.
불쾌.
혐오.
역겨움.
똥.물.
나는 남편이 쏟아내는 똥물을 피해 바카라상 앞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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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방문을 닫고 들어가듯 내가 바카라상 앞에 앉아 있으면 남편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그 사람 나름대로의 선이다.
평소 감정 조절이 어려워 아무렇게나 뛰어들던 사람에게 발악에 가까울 정도로 지켜낸 규칙.
어린 시절 아빠의 술주정이 너무 무섭고 괴로워 늘 밖을 떠돌 수밖에 없었던 내가 겨우 숨어들 수 있었던 곳은 교회의 강대상과 커튼 속이었다.
지금의 내게는 그 장소가 바카라상이다.
내가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마치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아이언 캡슐 안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무적이 된다. 이런 장소가 있다는 게 어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