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웰다잉하겠습니다>
슬럼프, 번아웃 그리고 셧다운
대리 때였다.
입사한 지 5년 차. 시스템 자체는 정상 작동하지만, 일시적으로 기량이나 성취가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는 정체감을 느낀 적이 있다. '주의 집중 실패(Attentional Narrowing)', 이른바 '슬럼프(Slump)'였다. 선배들은 말했다. 3년마다 슬럼프가 올 거라고. 그러나 온라인 게임인에게 슬럼프는 3달, 3주, 3일, 3시간 단위로 찾아오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이후로도 수많은 슬럼프를 맞이해야 했다. 롤러코스터와 같은 감정의 등락, 타인과의 갈등, 열심히 하고도 욕먹는 일상의 반복들이 슬럼프의 빈도를 높였다.
'번아웃(Brunout)'을 마주한 건 해외 주재원으로 유럽에 있을 때였다.
열망하던 주재원 자리를 성취했으나, 반복되는 격무와 잘해야 한다는 압박에 나는 늘 짓눌려 있었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소파와 혼연일체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제11차 국제질병분류(ICD-11, 2019)에서 번아웃을 의학적 질환이 아닌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 온라인 게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공식 등재했다. 번아웃의 핵심 3요소는 '정서적 고갈', '이인화 및 탈인격화', 개인적 성취감 저하'인데 나의 상태가 딱 그러했다.
조금만 더 그 상태가 유지되었더라면, 어쩌면 나는 '셧다운(Shutdown)'을 했을지 모른다.
'셧다운'은 스티븐 포지스(Stephen Porges) 박사의 다미주신경 이론(Polyvagal Theory)으로 설명된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면 투쟁-도피(교감신경) 반응을 넘어, 가장 원시적인 '배측 미주신경(Dorsal Vagal Complex)'이 활성화되어 유기체가 얼어붙는(Freeze/Immobilization) 방어 기제를 취한다는 내용이다. 내면은 슬픔이나 고통마저 느끼지 못하는 완전한 마비, 침묵, 감정적 단절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생존을 위해 뇌가 강제로 차단기를 내려버린 상태라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셧다운을 막아준 건 바로 '글쓰기'였다.
번아웃으로 소파와 한 몸이 되어 남이 올린 SNS와 짧은 동영상을 무한반복하던 나는 문득, '살고 싶다'란 생각을 했었다. 코로는 숨을 쉬고 있었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마음의 호흡, 영혼의 숨을 쉬고 싶다란 강력한 바람이 단전으로부터 올라왔다.
나는 꽤 오랜만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이리 소비적, 소모적으로 살고 있는 걸까. 생산적으로 살 순 없는 걸까?'
본업이 있는 온라인 게임인이 당장 생산해 낼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가장 감당 가능한 도전,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다. 잘 몰라도 속의 것을 내어 놓자는 마음으로 써 내려간 글은 생산물이 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무엇보다 글로 숨을 쉬고 있다고 표현할 정도로 글쓰기는 나에게 슬럼프와 번아웃 그리고 셧다운을 지혜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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