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가봐야 할, 죽기 전에 먹어야 할

<스테르담 웰다잉하겠습니다>

by스테르담
죽음의 무게에 대하여


옛 선조들에게 죽음은 한 개인의 사적인 종료가 아니라, 가문과 공동체 전체가 온 힘을 다해 감당해야 했던 삶의 가장 엄숙한 의례였다.

더불어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경외의 대상이자 관념이었다. 누군가 숨이 멎으면 지붕에 올라 망자의 옷을 흔들며 이름을 부르고, 부모를 여의면 묘 곁에 움막을 짓고 꼬박 삼 년을 머물렀다. 남은 이들의 시간을 통째로 멈출 만큼 거대한 질량을 가지고 죽음은 그렇게 감당하기 힘든, 삶에서 마주하기 버거운 '무게'가 되곤 했다.


지금은 다르다.

'극단적 선택'이란 용어가 있다. '죽음'은 어느새 우리에게 '선택'의 영역이 되었다. 거대한 신의 섭리나, 감당하지 못할 운명의 어느 서사가 아니다. 신이라는 절대자의 가장 강력한 권위라 생각했던 죽음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 영화 <어벤저스>의 타노스는 손가락 하나로 인류 절반을 날려 버린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그에 수긍한다. 너무 많은 존재, 너무 많은 숨들. 영화의 뼈대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슈퍼히어로들이 악당과 싸우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서의 생명들은 그들의 무게가 그리 무거워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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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와 죽음의 상관관계


현대 슬롯에 이르러 '죽음'이란 단어의 무게는 한결 가벼워졌다.

자본주의의 가속화는 이를 더 부추겼다. 500만 년 인류의 역사를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하면,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간은 23시 59분 56초다. 즉, 자본주의는 단 4초에 불과하다. 얼마나 빠르게, 얼마나 강력하게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극적으로 나타내주는 수치다.


'자본주의'의 무게는 '죽음'보다 더 무겁다.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돈에 울고, 돈에 웃고. 죽고 사는 것이 돈의 경계에 따라 갈리는 세상이 되었다. 자본과 돈은 어느새 '수단 이상의 무엇'이 되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게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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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게임인, 작가, 강연가의 페르소나를 쓰고 있습니다. '강한 영향력을 나누는 생산자'의 삶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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