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웰다잉하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또는 어디에나 나이에 걸맞은 대화 주제들이 있다.
어린 시절엔 공부와 일탈의 경계를 오가고, 대학 땐 낭만과 취업 사이에서 고뇌한다. 신입사원 시절엔 적성과 이직 그리고 월급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중년이 되면 아이들의 진로와 은퇴에 대해 떠밀리듯 떠벌린다.
중년이 더 지나고 나니, 이젠 '건강'과 '죽음'이란 단어의 빈도가 대화 속에서 늘고 있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건네는 인사는 날씨도, 기분도, 주식도 아니다. 무엇보다 '건강'에 대하여 서로 묻는다. 어디가 고장 났다거나, 무엇을 조심하라던가, 아플 땐 이러한 음식을 먹으면 그래도 괜찮다는 이야기들. 선조들이 그렇게도 원했던 장수(長壽)를, 그러니까 100세도 바라보는 시대가 되었지만 '무병'이 아닌 '유병장수(有病長壽)'를 받아들여야 함을 서로는 알고 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죽음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부모님이 돌아가실 나이가 되었고, 꼭 부모님이 아니라도 심심치 않게 지인들의 부고 소식이 들리곤 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죽음은 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각각의 이유를 이야기하다 보면 그것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내가 있다는 걸 (이야기할수록) 깨닫게 된다. 주니어였을 땐 온라인 게임에서의 부고 소식이 대부분은 부모나 조모에 대한 것들이었지만, 시니어인 지금은 종종 본인상이란 제목을 많이 보게 된 것도 그러한 마음을 들게 한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부모님은 어떻게 보내드렸어?"
"장기 기증 신청은 할 거야?"
"나는 자식들에게 연명치료는 하지 말라고 하려고."
이젠 일상처럼 이런 대화를 하고 있다.
마치 '은퇴'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그러한 톤으로. 걱정이긴 하지만, 묵묵히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로. 하긴, '죽음'은 어쩌면 일종의 삶으로부터의 '은퇴'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출근하고 싶어도 출근하지 못하는 때가 오는 것처럼, 살고 싶어도 더 이상 살지 못하는 때는 분명 온다.
일상의 대화 속에 나오는 주제들은 우리네 일상과 밀접하다.
그러니까 어느새 죽음이, 나의 일상에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터부시되고, 부정적이고 어두운 것이라 치부되지 않아서 오히려 나는 좋다. 죽음은 오히려 내어 놓고 이야기해야 한다. 그래야 잘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죽음을 늘 상기해야, 삶도 더 선명해질 테니까.
죽음은 어느 일상의 한 부분이란 걸.
이제 나는 받아들이려 한다.
많이 이야기하고, 미리 준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