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웰다잉하겠습니다>
'Well-Being'과 'Well-Having' 사이
1948년 WHO는 헌장 전문에서 웰빙을 건강의 핵심 개념으로 공식 채택했다.
"건강이란 질병이나 허약함이 없는 상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슬롯적으로 완전히 안녕한(well-being) 상태이다."
웰빙은 단순한 육체적 무병장수를 넘어, 마음의 평안과 슬롯적 관계의 건강함까지 포괄하는 총체적 삶의 질 개념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온 '웰빙(Well-Being)'이란 용어는 이와 결이 좀 달랐다.
1960~70년대 미국 서구권의 반전(反戰), 히피문화 그리고 대안적 자연주의 운동에서 출발하여 2000년대 초반 전 세계적인 라이프 스타일로 다가왔고, 무엇이든 조금은 과하게 몰입하는 우리네 근성에 따라 '웰빙'은 잘 먹고 잘 사는 '소비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무언가 점차, 이상하게 흘러갔다.
말 그대로 ‘좋게, 온전하게(Well)’ ‘존재하는 것(Being)’의 의미는 더 비싸고 좋은 것을 '소비'하고 '소유'하는 쪽으로 향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웰빙', '유기농'과 같은 말이 붙은 거라면 몇 배가 비싸도 성분이나 자세한 설명도 보지 않은 채 손에 집어 들었고, 교묘하게 '욜로'와 맞물려 이왕이면 한번 사는 거 비싼 걸로 하자는 소비 패턴이 형성되었다.
가진 건 많아지는데, 어쩐지 마음은 공허허진 그때에야 비로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를 떠올렸다.
그가 말한 참된 행복이란 순간의 말초적 쾌락이나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덕을 실현하며 한 생애 전체를 온전하고 훌륭하게 완주해 내는 ‘전 생애적 안녕’이었다. 무엇을 더 소유하느냐(Having)가 아니라, 어떻게 존재하느냐(Being)에 삶의 본질이 닿아 있다는 걸 나는 잠시 잊고 있었다.
이젠, '웰빙'보다 '웰다잉'
나는 오늘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눈을 뜬 오늘 아침. 나는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죽어가고 있는 것인가. 탄생의 순간에서 보면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고, 살아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사형선고가 이미 내려진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는 분명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껏 나는 '웰빙'에 집착하며 살아왔다.
정확히는 원하는 걸 손에 넣으려 했던 집착과 경쟁에 가까운 삶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니 이젠 본능적으로 '웰다잉'에 대해 깊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부모님 그리고 지인들(심지어는 본인상까지)의 죽음이 가깝고 잦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들 중 몇몇의, 생을 고통스럽게 맞이하는 모습을 보며 웰다잉에 대한 바람은 더 커지게 되었다. 잘 사는 것만큼이나 잘 죽는 게 중요할 텐데, 우리는 왜 이러한 준비를 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웰빙에서 웰다잉으로의 피봇이, 우리 삶엔 필요하다는 결론이다.
웰다잉의 진정한 정의
수많은 시간과 깊은 고민 끝에 내가 내린 '웰다잉(Well-dying)'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결코 거창한 죽음학의 이론이 아니다. 나의 마지막 날에 이르러 반드시 이러해야겠다는 다짐이자 살아 있는 순간들의 깨달음에 가깝다고 하는 게 옳겠다.
역설적이게도 웰다잉의 출발점은 임종의 순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의 삶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생애 전체를 훌륭하게 완주하려면 오늘 하루를 낭비하지 않고 내게 허락된 시간을 소중한 것들로 채워야 한다. 삶을 치열하고 성실하게 살아내지 못한 자에게 미련 없는 평온한 죽음이란 주어지지 않는다.
나름의, 각자의 버킷리스트들이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삶을 후회 없이 살아내게 하는 중요한 장치다. 그러나 한 가지 돌아봐야 할 건, 그 버킷 리스트들이 앞서 말한 '웰해빙'이나 소비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건 아닌 지다. 좀 더 생산적이고, 좀 더 자아실현적인 것들로 재구성을 해야 한다.
후회 없는 삶은 없다.
그러나 해보지 않고 후회하는 것과, 해보고 후회하는 것의 차이는 크다. 소비적이고 소모적인 삶보다,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삶으로 초점을 맞추다 보면, 분명 하루하루를 좀 더 잘 살아냈다는 느낌이 온몸에 충만할 것이다.
생의 마지막 장에서 인간의 존엄을 가장 크게 무너뜨리는 것은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 기계에 의존한 무의미한 연명이다. 평소 몸을 돌보고 건강을 지키는 일은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함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내 의식을 온전히 지키고 불필요한 고통의 시간을 줄이기 위한 최소한의 자기 존중이다.
고통 속에서 삶을 부여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분들을 보며, 그들에게는 애도를 보냈고 나에겐 저러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이 일었다. 고통 없이, 자는 동안 죽는 게 '복(福)'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고통 없는 죽음은 어느 하나의 큰 바람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년의 고통 없는 죽음은 그 이전의 건강함에 달려 있다. '유병장수'의 시대라지만, 요즘은 건강검진으로 병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고 또한 의학의 발달로 웬만한 병은 관리와 치료가 가능하다.
나 또한 작은 지병을 앓고 있는데, 이것을 조기에 발견하고 이로 인해 피해야 할 식습관을 알게 되니 오히려 건강해지는 가이드를 만난 기분이다. '고통'은 신체와 마음을 함께 아우르는 개념이므로 나는 운동은 물론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마음을 잘 챙기는 것에도 게으르지 않으려 한다. 동시에, 의미 없는... 숨만 이어가야 하는 연명치료는 미리 거부함을 밝힌다.
고통 없이 존엄하게 떠나는 것은, 살이 있는 기간 동안의 나에게 달린 숙명이다.
우리는 홀로 태어났지만 결코 홀로 살아가지 않는다.
내가 떠난 자리에 감당하기 힘든 병원비나 빚, 혼란스러운 상속 다툼, 혹은 오랜 간병으로 지친 가족들의 깊은 상처가 남는다면 그 퇴장을 결코 아름답다 이를 수 없다. 추억과 슬픔 그리고 애도는 남기되 부담은 남기지 않아야 한다. 내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해 둠으로써 사랑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추억’만을 선물하고 떠나는 배려, 그것이 웰다잉의 핵심이다.
요즘 세상, 가장 중요한 건 경제적 부담을 전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막대한 유산은 못 주더라도, 위대한 유산은 주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경제 교육을 시작했고, 그리고 각자의 주식 계좌도 열어 주었다. 차곡차곡 쌓아가는 성장주와 배당주의 복리가 자본주의의 본질을 깨닫게 해 줄 것이며, 그와 동시에 노동과 근로소득 또한 중요하다는 것도 뇌리와 마음에 깊이 남겨줄 것이다.
떠날 때를 대비해 사망 보험금 또한 세팅을 해놓았고, 정서적으로도 그저 슬퍼하지만은 않게... 나의 '웰다잉' 플랜에 대해 설파할 것이다. 그리하면, 어쩌면 남는 이들에게 나의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또 하나의 '예(example)'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남는 이들에게, 나는 그저 사랑과 감사한 마음만은 남기고 싶은 뿐이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가장 이상적인 마무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내가 머물다 간 세상에 작게나마 이바지하고 떠나는 일이다.
꼭 막대한 재산을 기부하는 거창한 행위가 아니어도 좋다.
내가 살아낸 시간 속에서 나눈 따뜻한 온기, 남겨진 세대에게 전하는 삶의 지혜, 혹은 세상을 조금이라도 덜 어지럽히고 떠나려는 태도만으로도 우리는 슬롯에 아름다운 유산을 남길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글쓰기'를 만나게 된 걸, 가장 감사한 '소명'으로 해석한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더 글을 쓰게 하는 것, 그것을 통해 치유받고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이상향에 한 걸음이라도 더 가까워지게 하는 것.
결국 웰다잉은 웰빙의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웰빙을 품어 안는 훨씬 더 넓고 깊은 바다와 같다. 잘 산다는 것의 마침표는 결국 잘 떠나는 것으로 찍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시작하고 치열하게 달려온 영화라 할지라도 결말이 초라하고 고통스럽다면 그것을 명작이라 부를 수 없듯이 말이다.
‘소비’로 전락한 웰빙의 허상을 걷어내고, 이제는 한 생애 전체의 온전한 완성인 웰다잉을 마주해야 할 때다.
어떻게 떠날 것인지를 명확히 응시할 때, 비로소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선명해진다.
잘 떠나기 위해, 오늘을 더 지극하게 살아내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