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르담 웰다잉하겠습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떠올리다
작년 10월 31일.
해외 주재를 하고 있던 나에게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어머니께서 쓰러지셨다는 소식과 함께. 전화 너머로 누나는 울고 있었고, 지구 반대편에 있던 나는 당장 비행기 표를 구해도 한국에 도착하는데 이틀이 걸릴 것이란 현실 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슬픔을 느낄 여유조차 없는 스스로가 조금은 놀라웠다. 어쩌면 어머니께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죽음과 연관된 소식 앞에, 나는 무력하고 또 무기력했던 것만 같다.
나를 포함한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때로 나는 심히 헷갈린다.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건지, 죽어가고 있는 건지에 대해. 가족을 위해 뛰고, 아이들 교육비를 내고, 온라인 게임에서는 의도치 않게 누군가를 짓밟아 위로 가야 하는 암투 속에서 나는 마치 영생할 것만 같은 존재가 된다. 그러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러한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란 생각을 하게 되지만, 내일도 출근해야 하는 어쩌면 죽음보다 더 각박하고 기묘한 숙명을 따라가다 보면 다시금 죽음이란 개념은 뇌리에서 사라지고 눈앞의 것들에 급급하게 된다.
언젠가 '웰빙(Well-being)'이란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이었다. IMF를 지나 회복기에 접어든 우리네에게, '잘 사는 것'은 중요한 가치로 스며들어왔고 '웰빙족'이란 말도 생겨났다. 무언가가 유행을 타면 기업들은 이를 놓치지 않는다. 웰빙은 곧 '유기농'이나 '프리미엄'이란 포장지로 싸이게 되었고, 마케팅과 협착하며 제품이나 서비스에 10% 이상의 가격인상을 이끄는 주범이 되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게 아니라,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게 아주 쉬운 시대가 된 것이다.
본질은 늘 변질되게 되어 있다. 주객전도는 일상이 되었다. 죽음이라고 예외는 아닐 것이 확실하다.
그리하여 나는 원래의 개념과 본질이 변질되기 전에, '웰다잉(Well-dying)'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기로 했다.
'잘 산다는 것'에 대해선 많은 고민을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잘 죽는 것'에 대한 그것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드니 지인의 지인은 물론,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도 심심치 않게 들려오기 때문이다. 나의 죽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죽음'은 시한부 환자나, 고령의 노년층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다들 알고 있지만, 서로 쉬쉬하는 모습에 수많은 의문과 사색이 피어난다.
내가 죽는다면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떠한 소식일까.
나의 가족들이 느낄 감정은 무엇일까. 아니, 그보다... 죽음이 마침표라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죽음이 마침표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른다. 죽은 자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적 믿음과 허구적 상상만이 죽음 이후를 가늠할 뿐, 누구도 확실한 점 하나를 찍을 순 없다.
그러니까, 죽음 이후를 고민하기보단 잘 죽는 것에 우선 집중하기로 한다.
잠시 우주의 먼지와 같은 하찮음을 뒤로하고.
내일 출근을 위한 알람, 오전 6시 30분.
잘 죽으려면, 우선 잘 살아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