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년의 시간을 걷다
오래된 벽돌길을 따라 골목을 돌아서면 푸른 타일의 마드라사가 나타난다. 시장의 돔 아래, 수백 년 전부터 이어져 온 거리의 풍경이 펼쳐진다. 황토빛 벽과 나무 문, 낡은 벽돌 한 장,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 찻집의 느린 햇살. 과거 유산이 박물관 안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 살아 있는 도시. 부하라다.
우즈베키스탄은 한때 극동과 유럽, 페르시아와 북아프리카를 잇던 실크로드의 중심이었다. 그중에서도 부하라는 특별하다. 사마르칸트처럼 웅장하지 않고 히바처럼 세련되지 않았다. 그러나 중세 도시의 모습이 가장 완벽하게 남아 있는 곳이다. 2,000년 역사를 간직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역사지구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북쪽 산악 마을 센토브와 아이다쿨 호수를 거쳐 도착한 부하라의 첫인상은 고요함이었다. 구시가지로 들어서자 그 고요함이 천천히 깨어난다.
부하라의 시간을 만나려면 구시가지 중심으로 들어가야 한다. 페르시아 제국 시대부터 이슬람 황금기, 러시아 혁명에 이르기까지 실크로드의 부와 명성을 누렸다. 옛 거리를 거닐다 보면 마치 중세 시대로 들어온 듯한 착각이 든다. 가장 먼저 발길을 멈추는 곳은 라비 하우즈(Lyabi-Hauz)다. 작은 연못이 있는 광장, 당나귀를 탄 호자 나스레딘 동상이 서 있다.
16~17세기에 형성된 광장은 여전히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장소다. 오래된 나무 그늘 아래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실크로드의 상인들이 쉬어 가던 휴식처가 지금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연못을 뒤로하고 골목으로 들어선다. 작은 상점 앞에 수공예품이 놓여 있고, 전통 모자를 쓴 노인이 의자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길은 자연스럽게 다른 광장으로 이어진다. 오래된 마드라사와 시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푸른 타일의 기하학적 문양, 햇빛에 바랜 벽돌, 세월의 흔적이 남은 나무 대문. 복원된 건축물조차 새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이미 시간의 일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목적지를 찾기 위한 지도는 필요 없다. 골목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칼론 미나레트의 꼭대기가 불쑥 솟아오른다. 첨탑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왜 이곳을 ‘시간이 멈춘 도시’라 부르는지 알 것 같다.
부하라의 시장은 옛 실크로드의 분위기를 진하게 풍긴다. 서로 연결된 돔형 시장 공간들이 구시가지를 채우고 있다. 타키 자라폰(환전 시장), 타키 펠팍 푸르숀(모자 시장), 타키 자르가론(보석 시장)이 인상적이다. 돔 아래에는 이국적인 직물과 장신구를 파는 노점들이 가득하다. 바자르 한쪽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것은 새를 닮은 작은 가위였다. 대장장이들이 만들어 온 전통 수공예품이다. 금실로 섬세한 자수를 놓는 장인들이 실과 재료를 자르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였다. 실용적인 가위에 긴 부리와 우아한 새의 형상이 흥미롭다. 장인의 시간이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칭기스 칸이 중앙아시아를 휩쓸 때, 부하라에서 유일하게 파괴하지 않은 건축물이 바로 칼론 미나레트였다고 한다. 모스크와 마드라사 복합 단지는 정교한 타일과 모자이크 장식이 돋보인다, 이슬람 건축 예술의 정수로 꼽힌다.
부하라 중심에 자리한 아르크 성은 1785년부터 1920년까지 부하라 토호국의 통치자들이 머물렀던 성채다. 성 안을 천천히 걷다 보면 박물관과 옛 궁정의 흔적, 무너진 성터가 모습을 드러낸다. 성벽 너머로 구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희뿌연 하늘을 배경으로 칼론 모스크가 솟아 있다. 아르크 성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전망대다.
부하라의 또 다른 얼굴은 시내 바깥에 있다. 시토라이 모히 호사. ‘달과 같은 별’이라는 뜻을 지닌 낭만적인 이름이다. 부하라의 마지막 군주였던 압둘아하드 칸과 알림 칸의 여름 별장이었다. 궁전에 들어서면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전통적인 중앙아시아 장식에 러시아·유럽 양식이 조화를 이룬다. 거울로 장식된 방에서는 작은 빛 하나도 수없이 반사되어 공간 전체를 반짝이게 만든다. 아르크 성이 오래된 도시의 역사와 시간을 품고 있다면, 한 시대의 마지막 화려함을 간직하고 있다.
칼론 미나레트가 실크로드의 등대였다면, 이스마일 사마니 영묘는 더 오래된 부하라의 시간을 품고 있다. 9~10세기 사마니 왕조의 수도였던 부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슬람 건축물 중 하나다. 화려한 타일도, 금빛 장식도 없다. 벽돌 하나하나를 눕히고 세워 쌓았다. 벽 전체에 정교한 기하학적 무늬를 만들어냈다. 햇빛이 움직이면 벽돌 사이로 드리운 그림자도 함께 움직인다. 색이 아닌 빛과 그림자로 완성한 건축이다.
1220년 칭기스 칸의 몽골군이 부하라를 휩쓸었을 때도 영묘는 살아남았다. 당시 주변의 흙과 모래에 묻혀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역사와 전설의 경계에 있는 이야기지만, 폐허 속에서 오늘까지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이다.
부하라 실크로드는 조금 특별하다. 실크로드는 비단과 향신료만을 운반한 길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 길을 따라 지식과 종교, 삶에 대한 생각까지 서로에게 건네주었다. 부하라를 걷는 일은 오래된 건축물을 차례로 찾아가는 여행보다, 상업과 문명의 길에서 영혼의 길로 깊어지는 시간에 가깝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다음을 향해 움직인다. 부하라에서는 천천히 걷게 된다. 오래된 벽을 바라보고, 문양 하나에 시선이 머물고, 차 한 잔 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 그 시간이 오히려 여행의 중심이 된다. 과거를 구경하는 여행이 아니다. 잠시나마 실크로드의 주인공이 되어 보는 . 그것이 내가 부하라를 기억하는 이유다.
글·사진 김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