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살며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중국이라는 나라를 하나의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처음 칭다오에 갔을 때만 해도 나는 중국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보던 모습, 인터넷에서 접한 정보, 가끔 만났던 중국인 관광객들이 내가 아는 중국의 전부였다.
하지만 막상 그곳에 살기 시작하니, 중국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한 나라였다.
어떤 날은 신호대기 중인 스포츠카들을 바라보며 감탄했고, 또 어떤 날은 비포장 도로 옆 허름한 집들을 보며 놀랐다.
칭다오 시내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슈퍼카를 몰고 다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명품 매장과 고급 레스토랑도 즐비했다. 그런데 차로 조금만 이동하면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어느 주말, 숙소에 둘 가구를 사기 위해 현지인들이 주로 이용하는 가구시장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시장으로 가는 길은 마치 다른 시대를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바퀴가 세 개 달린 개조 오토바이들이 검은 매연을 뿜으며 지나갔고, 집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지붕은 어릴 적 교과서에서 보던 너와집을 떠올리게 했다. 도로는 포장되지 않은 곳이 많았고, 차선도 신호등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렇게 복잡한 길에서도 사람들은 용케 부딪히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한국의 1970~80년대는 어땠을까 상상해보곤 했다.
반대로 주말에 칭다오 시내에 나가면 또 다른 세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좋아하던 카페가 하나 있었다. 해변 근처에 있는 작은 카페였는데, 저녁이면 보사노바 음악이 흘러나왔다. 조명은 어둡고 손님들은 조용했다. 금요일 퇴근 후 저녁에 가는 카페는 나의 또 다른 세상이었다.
그곳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독일인처럼 보이는 사람, 미국인처럼 보이는 사람, 일본인처럼 보이는 사람.
그리고 어느 날은 정말 낯선 경험도 했다.
바 테이블에 앉아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처음 보는 외국인이 다가와 자연스럽게 말을 건 것이다.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낯선 사람이 먼저 말을 건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신기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일인데, 그때는 문화 충격에 가까웠다.
그렇게 저녁 시간을 보내고 나면 근처 찜질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중국의 찜질방은 규모부터 달랐다.
한국의 웬만한 호텔 로비보다 넓은 휴게실이 있었고, 밤이 되면 사람들이 이불을 덮고 여기저기 누워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 해변을 따라 걸으면 세상이 그렇게 여유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외국에서 사는 것의 가장 큰 장점은 관광도 아니고 언어 공부도 아니라는 것을.
비교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늘 누군가와 비교하며 살았다.
대학 동기는 어디로 유학을 갔는지, 선배는 어떤 오케스트라에 들어갔는지, 친구는 임용시험을 붙었는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늘 누군가와 나를 견주며 살고 있었다.
그런데 중국에 오니 그런 비교가 사라졌다.
나는 그냥 외국인이었다.
내가 무엇을 입든, 어떤 차를 타든, 언제 결혼하든, 임용시험에 붙었는지 떨어졌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 자유로움이 생각보다 컸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돌아본 시간이었다.
만약 한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다시 임용시험 스터디를 구하고, 새벽까지 공부하며, 누군가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압박 속에서 지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나쁜 삶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시기의 나에게는 한 번쯤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학교의 환경도 비슷했다.
국제학교라는 이름 때문에 처음에는 꽤 현대적인 환경을 상상했다.
현실은 달랐다.
한국 학교에서는 당연하게 사용하던 교육행정시스템도 없었다.
출석은 손으로 체크했고, 시험문제도 직접 만들고 직접 채점했다.
결재 역시 전산 시스템이 아닌 문서 파일을 출력해서 처리하는 방식이었다.
음악실도 지금 기준으로 보면 놀라울 정도로 단출했다.
피아노 한 대.
컴퓨터 한 대.
프로젝터 한 대.
그게 전부였다.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니 적응이 되었다.
없는 것을 탓하기보다 있는 것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오히려 수업 준비를 더 많이 고민하게 되었고, 아이들과 직접 부딪히며 해결하는 시간이 늘어났다.
교사로서 참 좋은 훈련이었다.
그 시절 학교에는 한국에서 사라진 풍경들도 많이 남아 있었다.
매주 월요일 아침 운동장 조회가 있었고, 체력장도 했다.
학부모와 함께하는 사생대회도 열렸다.
당시에는 조금 번거롭다고 생각했지만, 지나고 보니 참 따뜻한 풍경이었다.
무엇보다 학생 수가 적었다.
아이들 이름은 물론이고, 성격과 가족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정말 가족 같은 학교였다.
그리고 아이들이 참 순했다.
요즘 교사들이 모이면 종종 "요즘 애들은..."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시절 내가 만난 아이들은 달랐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 서툴지 않았고, 선생님을 어려워하기보다는 좋아했다.
교무실까지 따라와 수다를 떨고, 쉬는 시간마다 손을 잡아끌며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인지 나도 아이들에게 더 많은 애정을 줄 수 있었다.
역설적으로 참 풍족한 시절이었다.
물자는 부족했다.
시설도 부족했다.
행정 시스템도 부족했다.
하지만 사람은 부족하지 않았다.
시간도 부족하지 않았다.
웃음도 부족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부족함'보다는 '만족함'이라는 단어가 먼저 생각난다.
칭다오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중 가장 큰 가르침은 아마 이것일 것이다.
행복은 더 많은 것을 갖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충분히 누리는 데서 온다는 것.
1년 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임용시험을 준비했을 때도 그 마음은 남아 있었다.
답답한 자취방 바카라상에 앉아 있을 때면 가끔 칭다오의 바다가 떠올랐다.
넓은 바다와 느린 바람, 그리고 그곳에서 느꼈던 자유.
덕분에 나는 공부에 매달리면서도 삶까지 시험에 맡기지는 않을 수 있었다.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지금의 나는 만족하며 살고 있는가.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 못할 때면, 나는 다시 칭다오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곳에서 배운 가장 단순한 진리를 다시 되새긴다.
부족함을 세기보다, 만족함을 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