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자가 되는 법

민족주의자가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일 필요도 없고, 애국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일 필요도 없다.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갈 필요도 없다.


그냥 해외에 나가 몇 달쯤 살아보면 된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랬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애국심이 특별히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월드컵이 열리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응원은 했지만, 그건 애국심보다는 축구를 좋아해서였다. 애국가는 너무 자주 들어서 아무 감흥도 없었고, 태극기는 운동회나 졸업식에서나 보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참 이상하다.


산소의 소중함은 숨이 차야 알고, 부모님의 소중함은 독립하고 나서 알게 되듯이, 나라의 소중함도 국경을 넘어가야 알게 되는 모양이다.


칭다오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지나자 비로소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살아남느라 바빴다.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이라는 충격적인 업무분장을 받아 정신이 없었고, 유치원 음악수업과 중학교 음악수업을 오가며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러다 보니 중국에 와 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낼 정도였다.


5월쯤 되었을까.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인교회에도 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한국학교 선생님들과도 친해졌다. 플루트 전공자라는 소문이 퍼졌는지 레슨을 부탁하는 교민들도 있었다. 주말이면 악기 가방을 들고 칭다오 시내로 향했다.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살던 곳도 분명 주소상으로는 칭다오였지만, 사람들이 말하는 '칭다오'는 또 다른 곳이라는 것을.


교민들이 말하는 시내는 해변을 끼고 있는 구도심 지역이었다. 내가 살던 신도시에서 그곳까지 가려면 택시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야 했다. 버스를 타면 한 시간이 넘게 걸렸다.


한국에서 한 시간은 서울에서 수원쯤 가는 거리인데, 여기는 아직 같은 도시였다.


중국은 역시 중국이었다.


버스 요금은 1위안이었다. 당시 환율로 170원 정도. 거의 공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싼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출근 시간의 버스는 사람이 많다는 표현으로 부족했다. 사람들이 버스에 타는 것이 아니라 버스 안에 압축되는 느낌이었다. 창문에 얼굴이 붙어 있는 사람을 보고 있으면 저 상태로 호흡이 가능한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결국 나는 조금 더 비싸더라도 택시를 탔다.

IMG_0666.JPG<출발지점에는 이렇지만 곧 있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물론 택시도 만만치 않았다.


어떤 기사님은 운전하면서 해바라기씨를 까먹었고, 어떤 기사님은 신호 대기 중에 창문을 열고 가래침을 뱉었다. 어느 날은 기사님이 너무 크게 트림을 하셔서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쳐드릴 뻔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것들마저 점점 익숙해졌다.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은 진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로 공문 하나가 내려왔다.


‘통일 기원 K-POP 가요제’


통일?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 있을 때도 그렇게 깊게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다.


그런데 지금 나는 중국 땅에서 통일을 주제로 가요제를 열어야 했다.

더 황당한 건 개최 학교가 우리 학교라는 사실이었다.


행사 기획, 무대 구성, 참가팀 준비, 음향 장비 점검, 리허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대학 시절 학생회 활동을 하며 음악회를 기획한 경험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학생 신분으로 하는 행사와 교사 신분으로 하는 행사는 전혀 달랐다.

학생 때는 실패해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었지만, 교사가 되면 그 실패의 바카라임도 함께 따라온다.


며칠 동안 늦게까지 학교에 남았다.

행사 순서를 짜고, 무대 동선을 그리고, 참가 학생들을 지도했다.


중국 시장에 음향 소모품을 사러 가기도 했다.

문제는 중국어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마이크 케이블을 사고 싶은데 단어를 모르니 직접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시늉을 했다. 케이블 타이를 사고 싶어 손가락으로 전선을 묶는 시늉도 했다.

신기하게도 중국 상인들은 대부분 알아들었다.

어쩌면 인간은 언어보다 몸짓으로 먼저 소통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기존 K-POP 곡을 개사해서 출전하기로 했다.

연습 중 학생들에게 물어봤다.

“얘들아, 통일이 되면 뭐가 좋을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서울에서 기차 타고 유럽 갈 수 있잖아요.”

교과서적인 답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그 나이 아이들에게 통일은 이념이 아니라 여행의 자유였던 것이다.


또 다른 아이는 말했다.

“북한 친구들이랑 친구하면 안 돼요?”

그 질문은 더 좋았다.

어른들은 통일을 정치와 경제로 설명하지만, 아이들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가요제 당일.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조선족 학교 학생들의 무대였다.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어를 쓰며 살아가는 아이들.

그런데 무대 위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게 통일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쓰고 한국 교육을 받았는데, 과연 저 아이들만큼 통일에 대해 고민해본 적이 있었을까.

002.jpg<몇 장 남겨진 그 때의 가요제>

그날 이후 이상한 변화가 시작됐다.


매주 월요일 야외 조회가 기다려졌다.

운동장에는 중국 국기와 태극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담장 너머 중국 공장 직원들은 늘 우리를 구경했다.


그리고 조회가 시작되면 전교생이 애국가를 불렀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아무 느낌도 없던 노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듣는 애국가는 달랐다.

운동장에 울려 퍼지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을 듣고 있으면 괜히 가슴이 뜨거워졌다.

마치 월드컵 경기 전 국가대표 선수들이 애국가를 부를 때의 기분과 비슷했다.

444.jpg<조회 모습>

하지만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그 해 있었던 대통령 선거였다.

재외국민 투표를 해야 했다.

함께 근무하던 선생님들과 총영사관으로 향했다. 왕복 세 시간이 넘는 거리였다.


투표 한 번 하려고 반나절을 써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귀찮지 않았다.

오히려 설렜다.


투표소 앞에 줄을 서 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국민으로서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구나.'

한국에서는 동네 학교 운동장만 가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하루를 투자해야 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당연했던 것이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SC20121206-203651.png<중국에서의 투표>

몇 년 뒤 나는 공무원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칭다오에서의 시간은 내게 생각보다 많은 것을 남겼다.

나라 밖으로 나가서야 나라를 생각하게 되었고,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보면서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가끔 농담처럼 말한다.

민족주의자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해외에 나가 살아보는 것이라고.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리고 그것 역시, 중국이 내게 준 또 하나의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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