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분의 공백이
집 안의 공기를 조금 비틀었다
늦었다는 말은 쉬운데
늦은 마음을 묻는 말은 어렵다
그냥
그 한 단어가
저녁 식탁 위에서 미끄러졌다
나는 국을 데우고
그릇을 반듯하게 맞추며
감정을 덮었다
하지만 종이 한 장
48점과
넌 왜 그것도 못해라는 문장이
내 눈끝을 찔렀다
문이 쾅 닫힌 순간
알았다
아이를 다그친 게 아니라
내가 닮아가던 어른의 목소리를
내가 가장 먼저 무서워했다는 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소선은 복도로 나왔다. 집 앞까지는 몇 걸음 되지 않았지만 그는 손목을 한 번 눌러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 유리 아래로 초침이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집 앞 복도는 늘 비슷한 냄새였다. 청소하고 남은 세제 냄새에 누군가 문 앞에 두고 간 택배 상자에서 나는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현관문 앞에 선 그는 도어록 앞에서 손을 멈춘 채 먼저 집 안을 떠올렸다. 현관 안쪽 신발장 위에 놓인 둥근 벽시계. 그 초침 소리가 집 안 시간을 맞춘다는 걸 그는 굳이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알고 있었다.
도어록을 누르는 손끝이 평소보다 느렸다. 숫자 버튼을 누를 때마다 손이 한 번씩 머뭇거렸다. ‘삑’ 하는 소리가 나고 잠금이 풀리는 짧은 마찰음이 이어졌다. 문을 열자 센서등이 켜졌다. 노란 불빛이 좁은 현관을 한꺼번에 비췄다. 현관에는 정리되지 않은 슬리퍼 한 짝만이 반기는 듯 반기지 않는 듯 무심하게 놓여 있었다. 소선은 애써 그걸 발끝으로 조심히 밀어주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방도 어깨에서 내리지 못한 채 안쪽을 한 번 훑어보았다. 이 시간이면 서현이 먼저 들어와 있었고 그는 늘 그 기척을 따라 부엌 쪽으로 몸을 돌리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집 안이 비어 있었다.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방금 울린 도어록 소리가 평소보다 5분 늦었다는 사실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5분밖에 안 되는 시간인데도 집 안 공기가 조금 어긋난 것 같았다.
소선은 가방을 현관 옆에 내려놓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먼저 형광등을 켰다. 흰빛이 퍼지자 싱크대 가장자리의 물때와 도마 위 칼자국 냄비 뚜껑에 말라 붙은 김 자국이 한꺼번에 드러났다. 냉장고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그는 안쪽에 넣어 둔 미역국 냄비를 꺼냈다. 어제 먹고 남은 것이었다. 뚜껑을 여니 식은 국 냄새가 먼저 올라왔다.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리고 불을 켰다. ‘톡’ 하고 불이 붙는 소리가 났다.
그는 잠깐 그 소리를 듣고 서 있다가 그제야 다시 손을 움직였다. 뭐라도 순서대로 하고 있으면 마음도 조금은 따라올 것 같았다. 밥공기와 국그릇을 꺼내 식탁 쪽에 올려두고 젓가락과 숟가락도 맞춰 놓았다. 아직 국은 끓지 않았고 밥도 데우지 않았는데 그는 괜히 그릇 자리부터 반듯하게 맞췄다. 손이 먼저 움직이면 생각이 늦게 따라오는 밤이 있었다.
그때였다.
현관문 밖에서 희미하게 발소리가 스쳤다. 또렷하게 들린 건 발소리보다도 끌리는 듯한 밑창 마찰음이었다. 사라락 하고 문 앞에서 잠깐 멎는 기척이 났고 이내 도어록 소리가 울렸다. 현관문이 열리며 서현이 몸을 들이밀었다. 센서등 불빛에 굽은 어깨가 먼저 드러났다. 바카라가방은 한쪽 끈만 걸친 채 축 늘어져 있었고 벗자마자 바닥에 툭 떨어졌다. 별것 아닌 소리인데도 소선은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왜 이렇게 늦었어”
말은 가볍게 하려 했는데 끝이 딱딱해졌다. 소선은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차갑게 나갔다는 걸 알아챘다. 서현은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신발을 벗었다. 오래 신고 다닌 양말이 발목 쪽에서 조금 내려와 있었고 발등엔 눌린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한쪽 발을 들어 올리다 균형이 흔들리면서 비뚤어진 신발 한 짝이 더 안쪽으로 밀렸다.
서현은 “그냥”이라고만 했다. 목소리는 짧았고 끝이 갈라져 있었다.
소선은 바로 말을 잇지 못했다. 뭐라고 다시 물어야 할지 잠깐 막혔다. 서현의 대답보다 방금 자기 입에서 나온 말투가 먼저 귀에 남았다. 어디서 많이 듣던 톤 같았다. 오래전에 집에서 듣던 어른의 목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스치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소선은 현관에 선 채로 잠깐 입술 안쪽을 씹었다. 한마디만 더 꺼내면 괜히 목소리가 더 날카로워질 것 같았다. 서현의 얼굴을 다시 보려다 말고 시선을 거둔 뒤 부엌 쪽으로 몸을 돌렸다. 더 보고 있으면 지금 당장 뭐라도 물어야 할 것 같았고 지금은 그 말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미역국이 끓기 시작하며 작은 기포가 올라왔다. 소선은 불을 조금 줄이고 밥을 데웠다. 국그릇에 국을 담고 밥공기를 식탁으로 옮긴 뒤 반찬 접시를 꺼내 놓았다. 젓가락을 놓는 위치까지 맞추는 동안에도 마음은 자꾸 현관 쪽에 머물렀다.
잠시 뒤 식탁 쪽에서 의자를 끄는 소리가 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으며 짧게 울었다. 이어서 젓가락이 밥그릇을 건드리는 소리 밥알을 헤집는 소리 금속이 도자기를 긁는 얇은 마찰음이 미역국 끓는 물소리 위로 얇게 얹히며 소선의 귀 안쪽을 긁었다.
그는 행주를 꺼내 싱크대 가장자리를 닦았다. 감정이 들어갈 틈을 막기 위해 손을 계속 움직였다. 행주가 물기를 머금고 있을 때의 무게가 손목을 끌어내렸다. 그 무게가 차라리 낫다고 느꼈다. 냄비에서 김이 다시 올랐다. 국물이 가장자리로 넘치려 하자 소선은 재빨리 불을 줄이고 손등으로 냄비 옆을 스쳤다. 뜨거운 국물이 튀어 손등에 닿았다. 화끈거림이 점처럼 남았다. 그는 손을 흔들지 않았다. 대신 더 세게 닦았다. 행주가 도마를 문지르는 소리가 거칠게 났다.
서현이 숟가락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딱
그 소리가 손등의 화끈거림보다 더 뜨겁게 느껴졌다.
식탁 위로 국을 옮길 때 소선은 서현의 얼굴을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면 뭔가가 시작될 것 같았다. 시작은 늘 끝을 데려왔다. 그는 국그릇을 내려놓고 밥공기를 밀어 놓고 반찬 접시를 다시 정렬했다. 서현은 국을 한 숟가락도 뜨지 않았다. 대신 밥알을 천천히 의미 없이 밀었다. 밥알이 가장자리로 모였다가 흩어졌다가 했다.
“학교는” 소선의 입이 다시 먼저 움직였다
“별일 없었어”
서현이 고개를 더 숙였다.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렸다. 그 틈으로 보이는 눈가가 붉었다. 울었다고 단정할 만큼 선명하진 않았지만 물기가 지나간 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소선은 그 자국을 보자마자 시선을 옮겼다. 자신의 시선이 오래 머물면 그 자국이 더 짙어질까 봐.
서현은 젓가락 끝으로 밥알을 한 번 더 눌렀다. 눌린 밥알이 납작해졌다.
“그냥”
그 말이 반복될 때마다 소선은 말을 더 길게 만들지 못했다. 대신 부엌으로 접시를 가지러 가는 척 몸을 일으켰다. 식탁 아래에서 의자 다리가 다시 긁히며 소리를 냈다.
부엌으로 들어가자 숨이 조금 더 쉬워졌다. 가스불 위에서 국이 다시 끓고 있었다. 소선은 불을 끄고 냄비 뚜껑을 닫았다. 김이 뚜껑 안쪽에 맺히며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톡 톡
그 소리를 듣는 동안 그는 싱크대 아래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의 수저들이 서로 부딪히며 짤랑거렸다. 소선은 그 소리를 더 크게 만들고 싶었다. 소리가 커지면 다른 소리를 덮을 수 있으니까. 거실에서 들리던 젓가락 소리가 잠깐 멎었다가 다시 이어졌다.
서현이 씻으러 들어갔다. 욕실 문이 닫히고 수돗물이 켜지는 소리가 집 안에 퍼졌다. 물이 세면대에 부딪히며 반사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그 소리가 들리자 소선은 거실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거실 테이블 옆 서현의 바카라가방이 놓여 있었다. 지퍼가 완전히 닫히지 않아 틈이 보였다. 소선은 그 틈을 보자마자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지퍼의 금속을 스쳤다. 차갑고 매끈했다. 지퍼를 더 열지 않고 틈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바카라가방 안은 따뜻했다. 사람의 체온이 남아 있는 공간 특유의 습기와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손끝에 구겨진 종이가 닿았다. 얇은 시험지였다. 그는 천천히 꺼냈다. 종이가 구겨진 부분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시험지 상단에 점수가 적혀 있었다. 48점. 빨간 펜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어 주변이 살짝 번져 있었다. 그 숫자는 숫자 이상으로 무게가 있었다. 소선은 그 무게를 손가락 관절로 느꼈다.
시험지를 뒤집는 순간 종이 뒷면이 거칠게 손가락을 걸었다. 연필로 꾹꾹 눌러쓴 문장이 있었다. 글씨는 삐뚤었고 같은 획이 여러 번 겹쳐져 있었다.
넌 왜 그것도 못해
연필심이 종이를 파고들어 앞면까지 오돌토돌 튀어나와 있었다. 소선은 엄지로 그 패인 자국을 쓸었다. 흑연이 손가락에 묻었다. 손끝이 거칠었다. 종이의 결이 살아 있었고 눌린 자리에서는 결이 더 얇아져 있었다.
그 문장을 읽는 동안 소선의 등 뒤 어딘가가 서늘해졌다. 그건 누군가의 숨결이라기보다 차가운 시선이 뒷목을 훑는 느낌이었다. 소선은 문장을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누가 쓴 글씨인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 서현의 필체라면 왜 이런 말을 스스로에게 적었을까. 혹은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을까. 그 둘 사이의 차이가 너무 커서 어느 쪽도 쉽게 붙잡히지 않았다.
욕실 쪽에서 물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켜졌다. 샴푸 거품을 헹구는 소리. 소선은 시험지를 급하게 접어 다시 손에 쥐었다. 접힌 종이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찔렀다. 그 자극이 오히려 마음을 붙잡았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시험지를 들고 있는 자신의 자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다. 들키면 안 되는 걸 들고 있는 사람의 자세였다.
서현이 욕실에서 나왔다. 발바닥이 젖은 채로 바닥을 밟는 소리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물방울이 튀는 소리. 소선은 입술을 열었다. 입 안이 마른 탓에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가 떨어졌다.
“이거”
시험지를 조금 들어 보였다
“이건 뭐야”
서현의 시선이 시험지로 갔다. 눈동자가 잠깐 멈추는 것 같다가 곧바로 움직였다. 서현은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시험지를 낚아챘다. 종이가 손에서 빠져나갈 때 소선의 손가락 끝이 허공을 한 번 더 긁었다. 서현은 시험지를 가방에 구겨 넣지도 않았다. 그냥 움켜쥔 채 방으로 갔다. 발소리가 빨랐다. 문 앞에서 멈추는 기척도 없이 손잡이가 돌아갔다.
쾅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를 통째로 흔들었다. 소선의 가슴 안쪽도 함께 울렸다. 닫힌 문은 나무판 하나인데 그 소리 뒤에는 금속 같은 단단함이 남았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철문이 내려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