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 등은 꺼져 있었고, 복도 끝 서현의 방문 아래로만 빛이 얇게 흘러나왔다. 문틈의 빛은 마루 결을 따라 길게 번졌고, 그 위로 벽시계 초침 소리가 일정하게 떨어졌다. ‘착’ 하고 한 번, 다시 ‘착’. 소선은 그 리듬에 휘말리지 않으려 발바닥에 힘을 주며 걸음을 옮겼다. 양말 끝이 마루에 닿을 때 나는 미세한 마찰음이 밤공기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는 종이 한 장이 접히지 않은 채 놓여 있었다. 낮에 봤던 그대로, 흰 바탕 위에 검은 인쇄가 차분히 정렬되어 있었다. 점수 칸의 숫자가 먼저 눈에 걸렸다. 48. 잉크의 농도는 균일했는데, 그 숫자만 유난히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소선은 손을 뻗어 종이 끝을 잡았다. 얇은 종이가 손가락 사이에서 살짝 휘어지며 서늘한 감촉을 남겼다. 종이의 차가움에 손끝의 온도가 조금씩 빼앗겼다.
그는 종이를 들어 빛 쪽으로 아주 조금 기울였다. 방문 밑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종이 위를 비추자, 표면이 고르게 반짝이지 않았다. 앞면인데도 군데군데 작은 돌기들이 튀어나와 있었다. 오톨도톨한 부분이 빛을 잡아먹으며 작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소선은 엄지손가락으로 그곳을 천천히 문질렀다. 종이의 결은 매끈했지만, 눌린 자국은 다른 재질처럼 거칠게 만져졌다. 한 번 문지르면 울퉁불퉁한 능선이 손톱 밑을 스쳤고, 다시 문지르면 그 능선이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끝나는지 손끝이 먼저 알아챘다.
종이를 뒤집어 보지 않아도 뒷면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글씨가 아니라 눌림의 깊이로 남은 흔적들이었다. 서현이 어떤 단어를 골랐는지, 어느 순간 힘이 들어가 손목으로 종이를 내리눌렀는지, 그 압력이 앞면까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소선은 종이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엄지를 움직였다. 돌기들은 일정하지 않았다. 어떤 곳은 짧게 끊기고, 어떤 곳은 길게 이어졌다. 문장이 만들어낸 리듬이 손끝에 고여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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