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

내 길에서 만난 사람들은 누구일까?

by수키

삶에서 점을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나는 살아오면서 어떤 점을 찍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일까. 내가 찍어 온 점들은 어느새 낡고 흐려졌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어느 날 선명하고 예쁜 나만의 점을 찍게 되었다. 할 수 없을 거라고 미루고 미루었는데, 어느새 내 두 손에는 펜이 쥐여 있었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바쁜 일상을 보내고 생각했다. ‘선택의 순간에서 나는 무엇에 의해 움직이는 걸까.’ 그 생각의 끝에는 사람이 있었다. 지금까지 걸어온 길에서 그 길이 잘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다름 아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인연들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세 사람이 떠올랐다. K, 구 주임님, 곰씨네그림바카라방 선생님.


K와는 일본에서 만났다. 어학원을 수료하고 조금 더 일본에 머물고 싶었던 나는 취학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동네에 있는 미술 전문 학원에 등록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학생 수는 많지 않았지만,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가진 친구들을 만난 덕분에 모든 게 새로웠다. 그중에 한 명이 K였다. 나보다 일찍 학원에 다녔기 때문에 나는 그를 ‘선배’라고 불렀다. 같은 수업을 듣던 날, 내 뒤에 앉아 있던 K에게 “점점 학교가 지루해지네요.”라고 말했다. 내 말을 듣고 K는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리고는 “킴, 보기보다 현명하네!”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날의 대화를 시작으로 함께 자전거를 타고, 드로잉 카페에 가고, 서로의 친구를 소개받으며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바빴던 나와는 달리 K는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쉬는 날 여유가 생길 때면 우리는 함께 공원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나는 주로 K의 얼굴을 그렸다. K는 내 그림이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페이스북의 프로필 사진으로 설정했다. 누군가가 내 그림을 진심으로 칭찬해 주는 것이 처음이라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칭찬에 힘입어 열심히 그리고, 또 그리며 예술가의 삶을 살았었다.


3년 후,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취직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유학을 하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취업하려니 녹록지 않았다. 하고 싶었던 편집디자인 회사에서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짜만 맞았다. 새로운 방향으로 일자리를 찾던 중에 웹디자이너를 뽑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일본 여행객을 대상으로 한국의 정보를 알려주는 회사였다. 일본어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들어서 이력서를 냈다. 그리고 면접 날, 구 주임님을 만났다. 서른 살에 취업했지만, 나는 디자인팀의 막내였다. 어디를 가도 나이가 많은 편에 속했기에 막내라는 말을 들으니 한껏 막내스러워지고 싶었다. 선배들이 일이 많아 주말에 회사에 출근할 때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회사에 갔고,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

퇴근할 때면 같이 가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선배들의 식사에 껴들었고, 밤늦게까지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 주임님과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그런 나를 귀여워해 주었다. 한 번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일본에서 지냈던 추억을 이야기하다가 라이브클럽에서의 경험이 정말 좋았고 그립다고 하자 근처에도 그런 곳이 있다고 했다. 그렇게 ‘홍대 문화’에 빠져들었다.

구 주임님은 종종 나에게 함께 라이브 공연장에 가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좋다고 했다. 구 주임님이 소개해 준 공연장을 함께 가다가 혼자 가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선 지역에서 열리는 레게 음악 페스티벌에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구 주임님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고 싶어서 흔쾌히 가겠다고 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컴컴한 산중에서 밤새도록 레게 음악을 들으며 황홀한 시간을 보냈다. 행복한 시간도 잠시, 구 주임님은 나보다 일찍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로 들려온 이야기에 의하면 배를 타고 여행을 다닌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간간이 들려오던 소식조차 전해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기에 더욱더 구 주임님이 그리워진다.


아이를 낳고, 신도시로 이사를 하고, 외로움에 몸부림치며 어디로든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때, 곰씨네 그림바카라방에서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러 사람과 어울려 새로 나온 그림바카라도 보고, 그림바카라으로 철학도 하고, 글도 썼다. 글쓰기를 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한번 해보세요.”라는 바카라방 선생님의 한마디에 “그럼, 한번 해볼게요.” 하고 시작했다.

시작이 가벼운 만큼 내 글도 한없이 가벼웠다. 처음 쓴 글을 사람들과 함께 바카라으로 묶었지만 한번 살짝 열었다가 바로 닫고, 다시 읽어보지 않았다. 그렇게 시작된 글쓰기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하나의 그림바카라으로 질문을 떠 올리고,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며 글로 옮겼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은 “한번 바카라으로 만들어 봐요.”라고 말했는데 어느새 내 앞에 정말 바카라이 만들어져 있었다. 아이에게 내 삶을 기록한 바카라을 선물해 주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일찍 그 꿈을 이루어서 당황스러웠다. 그 후로도 선생님은 종종 “한번 온라인카지노 해보세요.” 라든가 “한번 1인 출판사 해봐요.” 라든가 “한번 북페어에 나가봐요.” 등등. 그러면 나는 어느새 온라인카지노를 하고 있고, 1인 출판사 등록을 하고, 북페어에 나갔다.

무심하게 툭 던지는 그 한마디는 잔잔하던 내 마음속 호수에 파장을 일으켰다. 선생님이 ‘한번’이라고 말할 때면 그 말이 스위치가 되어 나도 모르게 ‘시작’하게 됐다. 아이가 나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던 날, 나는 곰씨네 바카라방의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고 말했다. 누군가에게 바카라방을 소개할 때면 바카라이 아닌 선생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 만약, 내가 어릴 때 주변에 이런 어른이 한 명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지금 만나게 된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림바카라 《두 갈래 길》의 글과 그림을 따라가니 자연스레 내 삶의 길을 찬란하게 해 준 사람들이 떠올랐다. 나는 삶은 결국 혼자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까지 나는 혼자 살아오지 않았다. 내 곁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다. 그림바카라의 마지막 문장에 마음에 와닿았다.

‘이 모든 길들이 너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 그 순간 인생은 찬란해지지.’

돌이켜보니 내 삶도 이 문장과 닮아있다. 나도 누군가를 만났을 때 더 찬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이야기 나눈 그림바카라

두 갈래 길(원제: Dos Caminos, 2017년)

라울 니에토 구리디 지음, 지연리 옮김, 살림(2019)

목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