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은 왜 연필만 쓰게 했을까?

교실의 규칙을 의심하기

by스카이쌤 SkySSSam

며칠 전 우리 반 아이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샤프 써도 돼요?"

"써도 돼. 대신 너무 가느다란 심은 위험할 수 있으니까 굵은 심을 써."

우리 반에서는 샤프펜슬을 써도 됩니다.


물론 연필 사용을 권하는 선생님도 계십니다. 특히 초등학교 저학년에서는 글씨를 처음 익힐 때 연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역시 초등학생 때는 당연히 연필을 썼고요.

그런데 저는 아이들에게 샤프를 쓰지 말라고 할 만한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연필이 샤프펜슬보다 글씨 연습에 더 좋다거나, 손가락 발달에 유의미하게 도움이 된다는 학술적인 근거를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원래 초등학생은 연필을 쓰는 거야'라는 이유만으로 금지하기는 조금 찜찜합니다.


제가 원래 그렇습니다.

다들 당연하다고 하는데 근거가 잘 보이지 않으면 일단 한번 의심해봅니다.


그러다 문득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우리 세대도 초등학생 때 연필을 썼습니다. 그 앞 세대도 그랬습니다. 지금도 많은 초등학교에서 연필을 권합니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진 관습이라면 분명 처음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정말 교육적인 것이었을까요? 저는 어쩌면 돈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우선은 교육적인 통념부터 짚어보고 넘어가죠.




1. 연필을 쓰면 소근육이 발달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설명은 손가락의 소근육 발달입니다.

그런데 연필이나 샤프펜슬이나 손에 쥐어보면 둘 다 길쭉한 막대기입니다. 하나는 나무이고 하나는 플라스틱이나 금속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이 차이가 손가락의 운동기능 발달을 좌우할 정도일까요?

적어도 연필을 사용한 아이가 샤프펜슬을 사용한 아이보다 소근육이 더 잘 발달한다는 근거는 찾기 어렵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손가락 주변의 소근육 발달에는 필기구의 재질보다 어떻게 쥐고, 얼마나 많이 사용하느냐가 더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2. 샤프펜슬은 위험하다?

샤프심이 뾰족해서 위험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아이들은 가끔 어른의 상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물건을 사용합니다. 교실에서 지켜보고 있으면 "손가락을 왜 연필깎이에 넣어보려 하는 거지?" 같은 행동을 실제로 합니다.


안전은 중요한 이슈죠. 그래서 저도 너무 가느다란 샤프심은 사용하지 않도록 지도합니다.

그렇다고 연필이 특별히 안전한 필기구인지는 의문입니다. 잘 깎은 연필 끝도 충분히 뾰족합니다. 게다가 연필을 쓰려면 연필깎이가 따라옵니다. 아이들의 위험감수 성향과 호기심을 생각하면 연필이라고 해서 사고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샤프펜슬이 위험할 수 있다는 말과 그래서 초등학생은 연필을 써야 한다는 말은 결이 좀 다른 것이죠.


3. 연필로 써야 글씨가 예뻐진다?

이 이야기도 정말 많이 듣습니다.

연필은 필압을 조절하기 쉬워 글씨 연습에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애매합니다. 연필은 쓰면 쓸수록 심이 뭉툭해집니다. 다시 깎으면 길이가 짧아지고 무게중심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걸핏하면 심이 부러지기도 합니다. 반대로 샤프펜슬은 거의 일정한 굵기와 길이로 계속 쓸 수 있습니다.


제가 교실에서 관찰한 모습도 통념과 조금 다릅니다. 샤프펜슬을 허용하면 오히려 필기구 자체에 관심을 가지면서 글씨를 예쁘게 쓰려고 노력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드는 샤프를 고르고, 친구들과 필기구 이야기를 하고, 그러다가 괜히 글씨도 한 번 더 써봅니다. 샤프펜슬이 글씨 연습을 방해하기는커녕 어떤 아이에게는 글씨를 쓰고 싶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왜 초등학생에게는 오랫동안 연필을 쓰게 했을까요?




어쩌면 답은 교육학이 아니라 물가에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한 가지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연필을 쓴 이유는 교육적인 우수성보다 가격과 보급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던 시절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조사해 본 바에 따르면 1970년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10원 정도였습니다. 라면 한 봉지는 20원, 짜장면 한 그릇은 60원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연필은 한 자루는 5원, 공바카라 한 권이 10원 정도였다는 증언이 있죠. 정확한 전국 평균가격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시 연필이 어느 정도 가격대의 물건이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버스 한 번 탈 돈이면 연필을 두 자루 살 수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 연필은 이미 학생이 일상적으로 소모할 수 있을 만큼 싸고, 국산 대량생산 체계도 갖춰진 물건이었습니다. 물론 당시 국내 경공업 사정이 많이 조악했던지라, 국산연필은 침을 묻혀서 써야 글씨가 써진다든가 조금만 힘을 줘도 부러져버리기 일쑤였다는 선배 세대들 이야기는 어렵잖게 들을 수 있죠.


반면 샤프펜슬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샤프펜슬은 몸체만 만들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느다란 심을 붙잡고 있다가 일정한 길이만큼 밀어내는 기구가 필요합니다. 나무 사이에 흑연심을 넣어서 마감하면 되는 연필에 비해 더 정교한 기술이 있어야 만들 수 있습니다. 국산화가 되기 전에는 전량 수입에 의존했을 테니 원가에 유통마진과 운송료 관세까지 붙어서 여간 비싼 물건이 아니었을 겁니다.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는 한병태가 엄석대에게 복종의 의미로 샤프펜슬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죠. 당시 생활상을 생각해보면 이건 아이가 쉽게 가질 수 있었던 물건이 아닌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샤프펜슬이 본격적으로 국산화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이고, 대중화가 된 것은 1980년대 중반 들어 국산 제도샤프가 보급된 이후입니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샤프펜슬 한 자루 가격은 당시 짜장면 두 그릇 정도에 해당하는 가격이었으니, 역시 어린 학생이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죠.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초등학생이 샤프펜슬을 갖고 싶다 하면 '어딜 쪼그만한 게'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돈 깨나 모이고 머리에 피 좀 마르면 가질 수 있었던 물건이죠.


당시 학부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간단합니다. 어린아이가 매일 학교에 가져갈 물건이죠. 값이 싸야 합니다. 어디서나 구할 수 있어야 하고, 고장이 잘 나지 않아야 합니다. 아이가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려도 다시 사주기 부담스럽지 않아야 합니다. 더구나 한두 아이의 취미용품이 아니라 전국의 수많은 초등학생이 매일 사용하는 학용품입니다.


이 조건이라면 연필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초등학생에게 연필을 쥐여준 이유는 소근육도, 글씨체도 아니었을지 모릅니다.

그 시대의 어린이에게 가장 싸고 만만하게 쥐여줄 수 있는 필기구가 연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연필을 보급했다 칩시다. 아이들이 '나도 샤프펜슬 갖고 싶어'라고 떼를 쓰겠죠? 뭐라고 해야 아이들이 그나마 납득할까요? 우리나라의 경공업 수준과 물가로 아이를 설득하는 건 너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연필을 써야 글씨도 예쁘게 써지는 거야, 이 변명은 아이에게도 좀 먹힐 것 같군요.



가격은 바뀌었는데 규칙은 남았다

그런데 한국은 빠르게 부유해졌습니다. 샤프펜슬도 국산화되고 대량생산되면서 더 이상 일부 아이들만 사용하는 비싼 문구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문구점이나 생활용품점에 가면 저렴한 샤프펜슬을 얼마든지 살 수 있습니다. 심만 갈아 끼우면 본체를 계속 사용할 수 있으니 오히려 경제적인 면도 있습니다.


즉, 연필이어야 했던 경제적인 이유는 점점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초등학생은 연필을 써야 한다'는 관습은 살아남았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가능성이 하나 생깁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연필을 사용했는데, 경제적인 이유가 사라진 뒤에도 관습은 남았고, 우리는 그 관습을 설명하기 위해 새로운 이유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요? 소근육 발달에 좋다. 글씨 연습에 좋다. 연필이 샤프펜슬보다 안전하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선택이었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교육적인 규범으로 바뀐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초등학생의 연필 사용이 실제로 이런 과정을 거쳐 정착했다는 역사적 사료를 찾아 증명한 결론은 아닙니다. 당시의 물가와 필기구의 생산·보급 환경,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학교 문화를 놓고 세워본 하나의 가설이죠.


하지만 이 가설을 세우고 나면 질문의 방향이 조금 달라집니다. '연필에는 어떤 교육적인 장점이 있을까?'라고 물으면 우리는 확증편향에 빠진 채 연필의 장점을 계속 찾아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 수많은 어린이에게 가장 싸고 쉽게 보급할 수 있었던 필기구는 무엇이었을까?'라고 물으면 연필이라는 답이 전혀 다르게 보입니다.


학교에는 오래된 관습이 많습니다. 처음 만들어질 때는 그 시대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바뀌는 속도보다 관습이 사라지는 속도가 훨씬 느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의 이유가 사라지고 나면 때때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우리는 관습을 버리는 대신, 그 관습이 계속 옳아야 할 새로운 이유를 발명해냅니다.


어쩌면 초등학생의 연필도 그중 하나일지 모릅니다.


아마 내년에 담임을 맡는 학생도 저에게 물어보겠죠.

"선생님, 샤프 써도 돼요?"

저는 아마 똑같이 대답할 것 같습니다.

"써도 돼. 대신 너무 가느다란 심은 쓰지 말고."



참고자료

황희경. 「50년간 교통요금 보니…시내버스 120배, 택시 63배 올라」, 『연합뉴스』, 2020. 11. 16.

한국파이롯트. 「걸어온 길」, 한국파이롯트 공식 홈페이지.

국가데이터처. 「소비자물가지수(품목별)」, 국가통계포털(KO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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