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부족한데도 가격을 매기지 않는 이유
제가 군 복무를 하던 시절에는 꽤 성실하게 헌혈을 했습니다. 인류애가 특별히 넘쳐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포상휴가 때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헌혈을 하면 포상점수를 받을 수 있었고, 그 점수를 잘 모으면 휴가를 나가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그래서 헌혈할 기회가 생기면 꼬박꼬박 참여했습니다. 심지어 그렇게 헌혈로 따낸 포상휴가를 나가서 또 헌혈을 할 정도였죠.
돌이켜보면 재미있습니다. 돈을 받은 것은 아니지만 제 행동은 분명히 보상에 반응하고 있었죠. 당시 저에게 포상휴가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 있는 보상이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가끔 혈액이 부족하다는 뉴스가 나오죠. 헌혈하는 사람들이 줄어서 혈액 보유량이 며칠분밖에 남지 않았다느니, 특정 혈액형이 특히 부족하다느니 하는 이야기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포상휴가 때문에 꼬박꼬박 헌혈을 했다면, 일반인에게도 좀 더 확실한 보상을 주면 되지 않을까요? 가령, 헌혈한 사람에게 돈을 주면 혈액부족은 없어지지 않을까요?
경제학적으로 생각하면 꽤 그럴듯합니다.
수요는 많은데 물량이 부족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해결바카라은 가격입니다. 사과가 부족하면 사과 가격이 오릅니다. 가격이 오르면 농가는 사과를 더 생산하려고 하고, 소비자는 비싸진 사과를 조금 덜 사려고 합니다. 그렇게 수요와 공급이 다시 맞춰집니다.
그런데 헌혈은 조금 이상합니다. 아무리 혈액이 부족해도 헌혈자의 보상은 사실상 0원입니다. 헌혈 한 번에 5만 원을 준다고 해봅시다. 그래도 부족하면 10만 원으로, 20만 원으로 올립니다. 그러면 평소에는 헌혈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팔을 걷어붙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실제로 연구에서도 현금이나 현금에 가까운 보상이 헌혈 참여를 늘리는 효과가 관찰됩니다. 적어도 '돈을 줘도 헌혈자는 늘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죠. 저 역시 현금은 아니었지만 포상휴가라는 보상이 있었을 때 열심히 헌혈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오히려 자발적인 무상헌혈을 안정적인 혈액 공급의 기반으로 권고합니다. 부족한 물건에 가격을 붙이면 공급이 늘어날 텐데, 왜 굳이 공짜로 달라고 하는 걸까요?
혈액은 사과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과를 파는 농부가 돈을 더 벌고 싶어서 사과를 더 가져온다고 해서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피는 다릅니다. 자신의 혈액이 얼마나 안전한지에 대해서는 헌혈자가 혈액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자신의 건강상태가 어떤지, 문진표의 질문에 사실대로 답했는지는 결국 본인이 가장 잘 압니다. 헌혈에 아무런 대가가 없다면 건강상태를 숨기면서까지 굳이 피를 뽑으러 갈 이유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헌혈 한 번에 10만 원을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당장 돈이 절실한 사람에게는 꽤 큰 금액입니다. 헌혈하면 안 되는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도 자신의 상태를 숨기고 참여할 유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이런 상황을 정보의 비대칭이라고 부릅니다. 거래하는 두 사람 가운데 한쪽이 상품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헌혈된 혈액은 여러 감염병 검사를 거칩니다. 그러니 돈을 받는 헌혈자의 피가 곧 위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혈액 공급의 목표는 그저 많은 피를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가능하면 처음부터 위험도가 낮은 사람들에게서 충분한 혈액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격을 올렸더니 공급량은 늘었는데 원하지 않았던 공급자까지 시장으로 들어온다면 이야기가 복잡해집니다.
또 하나 재미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은 꼭 돈 때문에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남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헌혈합니다. 누군가는 헌혈증을 얻고 싶어서 합니다. 친구를 따라갔다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냥 좋은 일을 했다는 기분이 좋아서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헌혈하면 5만 원을 준다고 해봅시다. 어제까지는 "오늘 좋은 일 하나 했다."였던 행동이 "피 뽑고 5만 원 벌었다."로 바뀔 수 있습니다. 돈이라는 보상이 들어오는 순간 행동의 의미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죠. 이런 일이 지속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헌혈이 슬롯적으로 의미있는 기부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의 소득활동으로 비쳐져서, 기존에 자발적으로 혈액을 기부하던 헌혈자도 발걸음을 끊게 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외부의 새로운 보상이 기존의 유인을 약화시키는 현상을 구축효과(crowding-out effect)라고 부릅니다. 헌혈에서도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온 문제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조심해야 합니다. '돈을 주면 사람들의 선의가 사라져 오히려 헌혈이 줄어든다'고 단정할 정도로 연구 결과가 깔끔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금전적 보상이 단기적인 헌혈량을 늘린다는 연구도 있죠.
그러니 문제는 돈이 혈액 보유량을 늘리는 데 효과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오히려 질문은 이것에 가깝습니다. 돈을 주면 어떤 사람이 새로 들어오고, 어떤 사람이 떠날 것인가? 장기적으로 수급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그것도 조금 이상합니다. 다시 군 복무 시절의 저를 떠올려보죠.
저는 돈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포상휴가라는 보상을 받았습니다.
현금으로 바꿀 수도 없고 저축할 수도 없었지만 당시의 저에게는 상당히 가치 있는 보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 행동을 바꾸는 데 성공했습니다.
헌혈에서는 이미 이와 비슷한 방법을 많이 사용합니다. 작은 기념품을 주기도 하고, 헌혈증서를 발급하기도 하고, 일정 횟수 이상 헌혈한 사람에게 표창을 하기도 합니다. 공공기관에서는 헌혈을 위해 내부적으로 비금전적인 인센티브를 지원할 수도 있죠. 이런 보상은 사람에게 행동할 이유를 주면서도 혈액 자체에 직접 가격표를 붙이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처음의 질문도 조금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헌혈자에게 돈을 줄 것인가, 말 것인가?" 보다는 "헌혈을 늘리려면 어떤 보상을 어떻게 설계해야 할까?"가 더 의미있는 질문이겠죠.
경제학에서는 사람의 행동을 바꾸고 싶다면 인센티브를 보라고 합니다.
제가 군 복무 시절 꼬박꼬박 했던 헌혈이 좋은 사례입니다. 제가 헌혈을 열심히 했던 이유는 숭고하지 않았습니다. 헌혈을 하면 주어지는 주스와 초코파이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휴가가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도 제가 내놓은 피는 누군가에게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헌혈의 보상으로 휴가를 얻을 수 있게 하자 헌혈이라는 행동이 늘었죠.
혈액이 부족할 때 헌혈자에게 더 많은 보상을 주자는 생각 자체가 황당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상당히 경제학적인 발상입니다. 다만 헌혈처럼 혈액이 안전한지, 헌혈자는 어떤 사람인지, 자발적으로 참여를 지속할 수 있는지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분야에서는 단순히 현금 보상의 액수만 높이는 것이 최적의 해법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죠.
결국 좋은 제도는 저처럼 평범하고 이기적으로 보이는 인간의 동기까지 이용해서 슬롯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만드는 제도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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