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목구멍보다 무서운 결제창

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기

by밍이

아마존 투어를 마치고 처음 먹은 음식은 아사이볼이었다. 브라질에 가면 꼭 먹어야 한다느니, 한국에 돌아와서도 아른거린다느니 하는 글을 하도 봐서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솔직히 당기지는 않았지만.

아사이볼은 아마존에서 나는 아사이베리로 만든 스무디에 과일이나 시리얼 같은 토핑을 얹어 먹는 음식이다. 실은 한국에서 실수로 아사이 아이스크림을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의 맛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아이스크림에 미쳐 사는 내가 끝까지 먹지 못했을 정도였으니, 아사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영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곳에 왔다면 그곳 사람들이 즐기는 건 한 번쯤 시도해 봐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스스로 세운 원칙에 발목이 잡혀 아사이 가게에 들어섰다.


주문부터 혼란스러웠다. 베이스를 고르고, 과일을 고르고, 시리얼과 견과류에 시럽까지 골라야 했다. 베이스는 또 왜 이렇게 종류가 많은지. 서브웨이 같은 주문 방식은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거의 수능이다.

나름 준비는 해 갔다. ‘가장 인기 있는 조합으로 주세요’를 포르투갈어로 미리 번역해 둔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친절한 점원분은 그 안에서도 내게 선택의 기회를 주려 하셨다……. (OH NO) 덕분에 한참 손짓을 주고받은 끝에 어찌어찌 주문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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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은, 글쎄…….

한국에서 먹었던 아사이 아이스크림보다는 나았다. 그렇지만 밍밍했다. 달지도 시지도 않은 것이 입안에 애매하게 머물다 사라졌다. 한 숟가락씩 떠먹을 때마다 입술은 보라색으로 물들었고, 추천받은 토핑 하나는 어찌나 딱딱한지 어금니 사이에 박혀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번은 안 먹을 것 같다. 굳이 다시 먹어야 한다면 토핑은 전부 과일로 해야지.

근데 안 먹을 것 같아.


지금 돌이켜보면 이 아사이볼은 앞으로 이어질 남미 여행의 예고편이었다. 사람들은 친절한데 내 뜻대로 되는 건 없고, 어찌어찌 해내고 나면 그 맛이 참 미묘한.




상파울루로 돌아와 포즈 두 이구아수로 떠날 준비를 했다. 포즈 두 이구아수는 이과수 폭포가 있는 브라질 쪽 도시다. 이후 일정에 맞춰 항공권을 점검하다가 이과수에서 이동할 때 이용할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도 온라인으로 체크인하려는데, 아고다에서 받은 예약 코드가 조회되지 않았다.

항공사에 물어봐도 확인되지 않는다는 답만 돌아왔다. 정작 예약한 아고다에서는 답이 없었다. What the-.

분명 결제까지 끝냈는데. 예약 확인서까지 받았는데!

잠들기 전까지 휴대폰을 몇 번이나 새로고침했는지 모른다. 한참을 씨름하고 나서야 업체에서 엉뚱한 예약 코드를 보내 줬다는 사실을 알았고, 제대로 된 코드를 받을 수 있었다.


출발 전부터 진이 빠졌지만, 그래도 이과수로 향하는 길은 즐거웠다. 새벽 비행기를 타고 오전에 도착한 나는 숙소에 짐만 맡긴 뒤 곧바로 폭포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호텔은 겉보기에 허름해서 조금 걱정스러웠다. 그런데 직원분이 어찌나 친절하신지. 내가 묻기도 전에 옷을 갈아입겠느냐며 2층 화장실로 안내해 주셨다. 폭포에 가면 물에 젖기 쉬우니 방수가 되거나 빨리 마르는 옷으로 갈아입으라는 뜻이었다.

슬리퍼를 담을 비닐도 주시고, 모기 기피제와 선크림도 빌려주셨다. 내가 열심히 바르고 있으니 누가 두고 간 거라며 우비까지 챙겨 주셨다. 진짜 너무 감사했다.


그렇게 기분 좋게 나서서 폭포행 120번 버스에 올랐다. 카드를 댔는데, 익숙한 결제음 대신 에러음이 났다. 다시 대도 마찬가지였다.

뒤에는 사람들이 잔뜩 서 있었다. 잘되던 카드가 왜 갑자기 안 되는 거지. 분명 카드를 탭해서 버스 요금을 낼 수 있다고 했는데…….

당황해서 다른 카드를 찾느라 허둥대고 있는데, 맨 앞줄에 앉아 있던 여자분이 아무렇지 않게 자기 카드를 찍어 주셨다. 너무 감사하고 죄송해서 돈을 갚겠다고 했지만, 그분은 쿨하게 거절하셨다.

진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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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이과수 폭포에 도착했다. 나이아가라, 빅토리아와 더불어 세계 3대 폭포로 불리는 곳이지만 기대는 반반이었다. 몇 년 전 나이아가라를 봤을 때도 ‘그냥 폭포네’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러려나 싶다가도, 그래도 여기는 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내 눈에 이과수는 나이아가라와 전혀 달랐다.

브라질 쪽 이과수 폭포는 빛에 따라 얼굴을 바꾸었다. 해가 비치면 하얀 물보라 사이로 노란빛이 번졌고, 구름이 그림자를 드리우면 한결 차분해 보였다. 물보라가 거세질 때는 풍경 전체가 뿌옇게 흐려졌다.

보트를 탈 때는 단단히 대비했으면서, 산바카라로는 괜찮겠지 싶어 방심했다가 홀딱 젖었다. 뭐, 그래도 신발은 살아남았으니까.

솔직히 내게는 나이아가라보다 아름다웠다. 나이아가라가 네모난 액자 속 폭포였다면, 이과수는 폭포와 정글이 한 몸으로 이어져 있었다. 폭포를 머리 삼아 강이 길게 뻗고, 그 둘레를 숲이 옷처럼 감쌌다. 그 사이를 오가는 새와 동물들까지 보고 있으면 풍경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평소에 자주 소음에 둘러싸여 있어서 우렁찬 폭포 소리에도 심장이 뛰지는 않았지만, 물멍 하기에는 더없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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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국경을 넘어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로 갔다. 창밖으로 판잣집이 늘어선 황량한 풍경이 지나갔다. 그제야 다른 나라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이날은 폭포를 보고 곧바로 부에노스아이레스행 비행기를 타야 해서 짐을 전부 챙겨 왔다. 10킬로그램짜리 짐을 들고 폭포를 둘러볼 체력은 없으니, 짐부터 맡겨야 했다.

블로그에서는 매점에 맡기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현금도 준비해 왔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QR코드를 찍고 웹사이트에서 직접 결제하는 보관함 시스템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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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부터 불길했다. 해외 사이트에서 결제할 때마다 내 카드들은 번번이 말썽을 부렸다. 어제는 버스에서도 안 됐고…….


예감은 정확했다. 아멕스 카드는 등록조차 되지 않았다. 챙겨 온 트래블 카드의 앱을 열어 봤지만 아르헨티나 페소로 환전하는 항목이 없어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했다. 큰 가방 깊숙이 넣어 둔 하나카드까지 급히 꺼냈는데, 그것도 실패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카드는 마스터카드였는데, 앞서 아멕스로 시도하면서 들어간 다른 카드용 결제창에서 계속 결제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도 모르고 하나카드마저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매점으로 들어가 GPT로 번역한 문장을 내밀었다.

[여기에 짐을 맡길 수는 없을까요.]

답은 "NO."

결국 다시 보관함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혹시 내가 뭘 잘못 누른 건 아닐까. 하나카드를 들고 처음부터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다행히 마스터카드 항목으로 들어가 진행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입력창에 번역기가 알려 준 대로 비밀번호를 넣었을 때-.

또 실패.

알고 보니 비밀번호가 아니라 카드 뒷면의 CVC 번호를 넣는 칸이었다. 결제 완료 화면이 뜨기까지 꼬박 30분이 걸렸다.

하……. 짐 하나 맡기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간신히 짐을 넣고 악마의 목구멍으로 가는 열차를 타러 갔다. 무료라고 들어서 역에서 30분을 내리 기다렸는데, 무료여도 티켓은 있어야 한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것도 100미터쯤 뒤에 있는 곳에서 따로 받아 와야 한다는 것도.

뛰어가서 받은 티켓에는 10시 반이 아닌 11시가 적혀 있었다. 또 기다려야 했다. 그 틈에 카피바라를 봤으니 완전히 손해는 아닌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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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폭포 앞에 서자 그 고생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아르헨티나 쪽 이과수의 유명한 관람 지점인 악마의 목구멍에서는 U자 모양의 거대한 틈으로 강물 전체가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하얀 물안개가 끝없이 피어올랐고, 새들이 그 사이를 이상한 궤적으로 날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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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의 폭포가 아름다웠다면, 이날의 폭포는 놀라웠달까. 가슴 어딘가가 조금 이상하게 뛰었다.

돌아 나오는 산바카라로에서도 자꾸 걸음을 멈추게 되었다. 많은 원숭이들도 만났고, 새로운 카피바라도 만났다. 통통한 카피바라 한 마리는 숲에서 튀어나왔다가 황급히 유턴해 사라졌다. 귀여워. 코아티라는, 너구리 비슷하게 생긴 동물들도 있었다. 아름답게 쏟아지는 폭포를 보고, 불쑥 나타나는 동물들을 구경하며 산뜻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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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중간에 뭔가 사 먹으려다 카드가 또 안 되는 바람에 점심은 자연스럽게 걸렀지만.


여행을 다녀온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이과수의 풍경은 선명하다. 그만큼 좋았다. 하지만 그날의 나는 배가 고팠지.

관광을 마치고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기 위해 공항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도 마땅히 먹을 게 없었다. 앙상한 크루아상 하나를 샀더니 생지 맛이 났다. 그러다 구석에서 하드록 카페를 발견했다.

'이제 뭔가 제대로 먹을 수 있나?'

즐거운 마음으로 걸음해, 번역기를 이용해 오렌지 주스와 치킨을 주문했다.

그러나 치킨은 없었다……. 게다가 오렌지 주스인 줄 알고 받은 음료는 레드불. 아니, 번역기 무슨 일이야. 만 원짜리 레드불을 마시며 생각했다. 그래도 맛은 있네.




아름다운 풍경과 굶주림을 뒤로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비행 중에 기체가 흔들렸던 탓인지, 무사히 착륙하자 승객들이 박수를 쳤다. 이것이 남미 감성인가. 창밖으로 보이는 밤의 도시는 끝없이 넓었다.

택시가 멈춘 곳은 고딕풍의 오래된 건물 앞이었다. 호텔이 맞나 싶어 망설이자 기사님이 경적을 울리며 손짓했다.

- 거기로 들어가.

말은 못 알아들었지만, 아마 그런 뜻 아니었을까. 반신반의하며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리고 제법 트렌디한 로비가 나타났다.


다행이다. 제대로 왔구나. 이제 체크인만 하면 쉴 수 있겠다.

직원분이 결제를 도와주겠다며 단말기를 내밀었다.

나는 카드를 꽂았다.


삐빅.

결제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