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오지 않는 예약 택시

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기

by밍이

새벽의 상파울루.

택시를 타고 새벽녘을 지났다.


뒤로는 주홍빛 여명이 번져 오르고, 앞에는 아직 푸르스름한 밤의 잔상이 남아 있었다. 새벽보다 반 발짝 앞서 달려, 나는 상파울루에 닿았다.


첫날은 상파울루를 돌아다녔다. 미술관에 들렀다가 이비라푸에라 공원을 좀 걷고, 일본인 거리로 넘어가 가볍게 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벽화 거리나 상파울루 메트로폴리탄 성당도 후보였지만 뺐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가고 싶은 곳이 자꾸 불어나는데, 막상 도착하면 몇 군데는 미련 없이 지우게 되는 것 같다. 그날의 몸 상태와 이튿날 새벽같이 공항으로 가야 하는 일정을 떠올리면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마나우스(아마존)에 다녀온 뒤 상파울루로 다시 돌아올 예정이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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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행선지는 MASP라는 미술관이었다. 볼거리가 많지 않은 상파울루에서 가장 이름난 곳이다. 낯선 화가들의 그림 사이, 아는 이름들을 마주하는 게 꽤 즐거웠다. 고흐, 르누아르. 남미만의 색다른 그림들도 분명 매력적이었는데, 어째서 자꾸 눈에 익은 화가부터 찾게 되는 건지.


다음으로 간, 이비라푸에라 공원은 널찍하고 분위기가 느긋해서 마음에 들었다. 큰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달리고, 돗자리도 없이 잔디에 드러누운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제일 신기했던 건 가상의 진영 싸움 같은 걸 벌이던 무리였다. 가짜 갑옷을 입고 가짜 칼을 휘두르고, 그걸 또 가짜 방패로 막고. 나도 저 틈에 끼어 칼싸움을 했다면 어떤 자세로 막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면서도 한동안 그 무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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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호수, 한국에선 본 적 없는 식물들, 쨍하게 맑은 날씨. 하나같이 기분을 들뜨게 했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건 사람들의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웃통을 벗고 뛰는 사람, 공놀이하는 사람, 휴대폰을 꺼내 든 사람들. 상파울루는 치안이 나쁘기로 악명이 높아서, 스트랩을 걸었더라도 휴대폰을 손에 쥐고 다니지 말라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하지만 이비라푸에라 공원에서는 달랐다. 물론 한국에서처럼 휴대폰을 아무 데나 두고 다녀서는 안 되겠지만, 적어도 여기서만큼은 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부터 내내 곤두서 있던 신경이 그제야 조금 느슨해졌다.


설렁설렁 돌아다니다가, 다른 곳보다 몇 배는 긴 줄이 늘어선 매대를 발견했다. 뭘 파는지도 모르면서 괜 궁금해졌다.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줄 서는 십원빵 가게엔 잘 가지 않으면서, 외국에만 나오면 이런 건 꼭 먹어 보고 싶어진다. 현지 사람들은 뭘 좋아하는지, 왜 좋아하는지가 곱절로 궁금해진달까?

앞사람들이 하나둘 받아 가는 걸 보니, 속을 파낸 레몬에 아이스크림을 얹은 모양새였다. SNS용 가게인가 싶었는데, 오래 기다려 받아 든 아이스크림은 엄청 맛있었다. 레몬 아이스크림이니까 신맛과 단맛. 호숫가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조금씩 떠먹으며 일렁이는 물결을 한참 바라보았다.


일본인 거리까지는 우버를 탔다. 지도에서 일본인 거리라는 '리베르다지'를 찾아 목적지로 찍었다. 차는 분명 제대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창밖이 이상한 거다. 관광객처럼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길가에 앉은 몇몇이 사납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우버 안에 있는데도 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이 본능적으로 들었다. 여기서 내리긴 좀 찝찝한데…. 다행히 기사님이 내 표정을 읽으셨는지, 말 한마디 통하지 않았는데도 일본인 거리 가까이까지 차를 조금 더 몰아 내려 주셨다.

고작 한 블록 차이였다. 그런데도 단번에 관광지로 넘어온 느낌이 훅 들었다. 한적하고 수상쩍던 거리는 온데간데없고, 사람 틈을 비집고 걷기도 버거울 만큼 붐볐다. 원래는 여기서 교자나 초밥으로 저녁을 먹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게 앞마다 선 줄과 도로를 꽉 메운 인파를 보니, 여기서 뭘 먹기는 도저히 무리였다. 결국 거리에 10분이나 있었나? 다리만 후다닥 건너 보고는 숙소 쪽으로 돌아갔다.


결국 저녁은 근처 작은 쇼핑몰에 있는 맥도날드에서 먹었다. 날은 저무는데 멀리 가기는 조금 무서웠고, 첫날부터 큰돈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맥도날드는 그래도 무난하니까-. 그렇게 먹은 그날의 햄버거는 지금껏 먹어 본 맥도날드 중 가장 맛이 없었다.

패티는 납작하고 짰다. 퍽퍽하기도 했고. 감자튀김 위에는 초록색 소스가 뿌려져 나왔는데, 고수를 마요네즈에 섞은 맛이었다. 끝내 그 정체는 알아내지 못했지만.




다음 날 새벽, 아마존으로 가기 위해 다시 공항으로 향해야 했다. 그것도 좀 싸게 가 보겠다고 비교적 저렴한 비행기를 잡는 바람에, 숙소에서 한 시간 넘게 걸리는 비라코푸스 캄피나스 국제공항(VCP)으로. 그런데 새벽엔 우버가 잘 안 잡힐까 봐 택시까지 미리 예약해 뒀는데, 다섯 시에 온다던 차가 오지 않는 것이다.

그때부터 기분이 상했다. 오긴 오는 건지, 오고 있는 건지, 아예 안 오는 건지. 그걸 알아야 우버라도 잡아 볼 텐데, 예약 업체는 메시지에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새벽 댓바람부터 전화를 걸자 그제야 오 분쯤 걸린다고 했다. 차 번호를 물었더니 운전기사의 전화번호만 보내왔다. 내가 그 번호로 어쩌라는 건지. 편도로 십칠만 원을 냈다는 사실이, 기다리는 동안 서글플 만큼 선명해졌다.

상파울루에 도착했던 새벽에는 창밖의 여명을 구경했을 때와 다르게, 이번에는 휴대폰의 시각만 들여다본 채 초조하게 차가 언제 오는지를 기다렸다. 차가 마침내 도착했을 때는 안도감보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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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나니 시간이 남았다. 이것이 늘 일찍일찍 움직이는 자의 말로다. 딱 맞춰 준비하면 덜 피곤하고 붕 뜨는 시간도 없으리라는 걸 알지만, 나 같은 성격은 어쩔 수가 없다. 친구와 약속이 있으면 10~15분 먼저 가 있는 건 기본이고(어릴 땐 30분씩 일찍 나가 있기도 했다), 출근도 30~40분씩 일찍 하는 타입이라. 남는 시간 동안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당겼지만, 메뉴판에서 찾지 못해 카푸치노를 골랐다. 졸음만 쫓으면 그만이었으니까.


그런데, 맛있었다. 와. 진짜.

KakaoTalk_20260911_155653868_01.jpg완벽한 커피

택시 때문에 쌓인 피로가 무색하게, 이 커피 한 잔으로 모든 게 완벽해지는 기분.


마나우스행 비행기에서 내 자리는 하필 가운데였다. 이것 역시, 자리를 예약하면 추가금을 내야 해서 설정하지 않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다. 양옆의 덩치 큰 남자들이 번갈아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앞에서는 코 고는 소리, 뒤에서는 아이 울음소리. 소리들이 잦아들자 이번에는 배가 살살 아파 왔다. 요 몇 년 사이 나이가 들면서 배 아픈 일이 부쩍 늘었다. 아마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감상에 잠기기에는 몸에 신경 쓸 곳이 너무 많았다.


그때 승무원이 간식을 나눠 주며 음료를 물었다. 나는 역시나 커피라고 답했다. 그런데 돌아온 질문은-.

"After coffee?"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커피 다음이라니. 아직 커피도 못 받았는데 그다음 마실 것까지 정해야 하나? 당황해서 눈만 끔뻑이자, 승무원은 나를 포기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양옆 사람들에게는 주스를 건네고, 나는 패스. 내 테이블 위에는 간식으로 받은 작은 빵과 젤리만 놓여 있었다. 아, 손이라도 써서 이야기해 볼걸. 절망이었다.


우여곡절은 있었어도, 막상 마나우스에 내리니 신이 났다. 첫날부터 투어를 예약해 둔 터라 공항에는 기사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올라타자,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어린 여자아이 둘이 있는 것 아닌가. 귀여워! 물어보니 동생들이라고 했다. 간식이라도 있으면 주고 싶었지만, 내게 있는 건 기내에서 받은 작은 빵뿐이라…. 먹어 보지도 않은 걸 내밀기는 좀 그랬다.


사십오 분쯤 달려 본격적인 투어를 위해 배에 올랐을 때는 다른 일행들이 이미 자리를 다 차지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나는 통로에 대강 자리를 잡았다.

가족이나 부부끼리 온 듯한 사람들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혼자 온 동양인은 나뿐이었다. 간간이 알아들은 말을 이어 보니, 옆 사람은 호주에서 왔고 은퇴 전에는 교사였던 것 같았다. 친절한 분이었다. 늦게 합류한 탓에 짐 둘 곳이 마땅치 않았는데, 선뜻 자기 자리 밑에 두라고 해 주시기도 하고. 덕분에 통로에 덩그러니 놓일 뻔한 짐이 잠시나마 갈 곳을 찾았다. 아래로 밀어 넣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마침내 배가 움직였다. TV에서만 보던 아마존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서는 것이었다. 잔뜩 들떠 눈을 반짝이던 찰나, 시야 한쪽으로 무언가 날아들었다.


모기였다.

미친 크기의 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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