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은 알아서 되는 것 아니었나요?

여자 혼자 떠나는 남미 여행기

by밍이

옆자리에서 라면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예전에는 비행기에서도 라면을 제공하곤 했지만, 요즘은 난기류 같은 안전 문제 때문에 뜨거운 물이 필요한 라면은 잘 제공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그런데 어째서인지 옆자리 승객은 컵라면 뚜껑을 열고 뜨거운 물까지 부어 먹고 있었다.


컵 위로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며 괜히 마음이 조급해졌다. 비행기가 곧 출발하려고 하는데 언제까지 먹는 거지? 설마 엎지르지는 않겠지? 심지어 옆자리 승객의 무릎 위에는 인형까지 잔뜩 얹혀 있어서, 정작 라면을 먹는 사람보다 내가 더 불안했다.

이것이 또 나의 단점이다. 걱정이 많고, 한번 시작된 생각은 생각에 생각을 물고 끝없이 뻗어나간다. 그렇다고 불만을 직접 말할 만큼 담대한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정면만 바라본 채 마음속으로 조용히 불안해했다. 곁눈질조차 하지 않았다. 괜히 쳐다봤다가 상대가 신경 쓸 것 같아서.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라면은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전에 무사히 사라졌고, 그제야 나는 안도하며 노트북을 꺼냈다.

원래는 글을 좀 쓰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비행기를 타기 전, 의지에 가득 찼던 나의 생각일 뿐.

‘비행시간이 스물다섯 시간이나 되는데, 이따 쓰지 뭐.’

그렇게 내 노트북은 다시 조용히 닫혔다.

차라리 영화나 드라마라도 다운로드하여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한국에서 난, ‘노트북으로는 작업을 해야지’라는 굳은 결심으로 일부러 놀거리를 넣지 않았다. 그 결과 비행기에서의 노트북은 아주 훌륭한 무쓸모 기계가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글을 쓰겠지’라는 안일한 미룸과 함께.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이런 노트북 사용 계획부터 시작해 꽤 많은 것을 미리 정해두었다. 준비 기간이 짧았다고 해서 계획까지 부족했던 것은 아니다. MBTI를 맹신하는 편은 아니지만, 계획을 세워두고 그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꽤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점에서 내가 J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어느 도시에서 며칠을 보낼지, 몇 시 비행기를 탈지, 공항에 도착해서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할지까지 정해두었다. 특히 늦은 밤에 도착하거나 이른 아침에 출발해야 하는 일정에는 Klook이나 Booking.com을 통해 택시까지 미리 예약했다.

여자 혼자 떠나는 첫 남미 여행이었기에 투어와 숙소, 항공편도 대부분 한국에서 예약을 끝냈다. 물론 남미를 오래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이동할 도시를 정하고 숙소를 잡으며 훨씬 유연하게 여행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몇 달을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고작 3주에서 한 달 남짓한 여행에서 즉흥성을 즐기기에는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투어도 현지에서 구하면 더 저렴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스페인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나로서는 미리 영어 투어를 예약해 두는 편이 마음 편했다. 물론 이 선택이 나중에 예상하지 못한 상황을 만들어냈지만……. 그 이야기는 뒤에서 다시 하기로 하고.


계획에 매몰되어 있던 나는, 이 정도로 준비해 두었으면 여행도 어느 정도는 내가 구상한 흐름대로 흘러갈 거라고 믿었다. 원래 패키지 투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패키지 투어로 만들어놓았으니, 당연히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애틀랜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내가 탄 비행기는 델타항공이었다. 한국에서 출발해 미국 애틀랜타를 경유하고 브라질 상파울루로 향하는 일정. 그런데 애틀랜타에 도착한 뒤 다음 비행기의 탑승이 시작될 때까지 남은 시간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충분할 줄 알았다. 미국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ESTA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입국심사와 보안검색을 다시 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걸로 문제가 생길 줄은 알았을까?

비행기 안에서 와이파이에 연결해(델타 항공은 미국 상공에서는 무료 와이파이가 가능하다!) 즐겁게 미리 미국 환승 절차를 살펴보다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Q. 미국을 경유할 때, 입국심사가 오래 걸릴 수도 있나요? A. 네.

Q. 오래 걸리면 어떻게 되나요……? A. 비행기를 놓치는 거지요.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이동이 많아서 커다란 배낭을 가지고 비행기에 탑승한 나는 위탁수하물이 없었지만, 예전에는 환승객이 짐까지 다시 찾아야 한다는 글도 보였다. 같은 항공사의 비행기로 갈아타는 것이니 어느 정도는 알아서 시간을 조절해 줄 것이라 믿었지만, 아니었다.

물론 항공사가 다음 비행 편을 마련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나. 내가 몇 달을 여행하는 것도 아닌데 하루라도 밀리면 그 뒤의 일정도 골치 아파질 판이었다. 심지어 나는 상파울루에 도착하는 다음날 새벽 또 브라질 마나우스(아마존) 행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무료 와이파이가 된다며 신나 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었다. 좌석 화면 속 비행기 아이콘이 애틀랜타에 가까워질수록, 내 머릿속에서는 남은 시간이 초 단위로 줄어들고 있었다.

image.png

비행기 문이 열리자마자 뛰었다. 사실 그전에 작은 난관 하나가 있었다. 머리 위 선반에 올려둔 배낭을 내려야 한다는 것. 나는 키도 작고 힘도 센 편이 아니라, 거의 10kg에 육박하는 짐을 꺼내다가 머리 위로 떨어뜨리면 어떡하나 은근히 걱정됐다. 다행히 배낭 밑을 손으로 받쳐 조심스럽게 당기니 생각보다 무리 없이 내려왔다. 그렇게 그 10kg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냅다 뛰었다.


망할.

입국심사 줄은 다행히 엄청나게 길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안심할 만큼 짧은 것도 아니었다. 예전에 LA에서 입국심사에만 두 시간이 걸린 적이 있었던 나는 불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줄에 서서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앞쪽을 살피기를 수십 분. 다행히 입국심사는 30분 남짓, 보안검색에는 15분 정도가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

'살았다!'

사람들은 아직 탑승을 기다리며 줄을 서고 있었다. 그제야 미친 듯이 빨라져 있던 시간이 다시 평범한 속도로 돌아왔다. 그제야 화장실도 다녀오고, 이도 닦았다. 귀국할 때도 미국을 경유해야 하니, 이 짓을 또 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다시 상파울루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때는, 여행을 시작한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도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간절했다. 한국에서의 나는 아침에도 아아, 점심에도 아아, 심지어 저녁에도 아아를 달고 사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미국 항공사라 그런지 음료를 받을 때마다 얼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혹시? 커피에도…… 얼음을 넣어줄 수 있으려나?'

반신반의하며 커피를 주문하면서 물었다.

“얼음도 넣어주실 수 있나요?”

승무원은 너무나 흔쾌히 된다고 했다.

기내에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몇 시간 전 애틀랜타 공항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일이 갑자기 전생처럼 멀어졌다.

image.png

조금 뒤 음료 카트가 다시 왔을 때는 나도 조금 용기가 생겨 이번에는 먼저 아이스커피를 부탁했다.

하지만 이번 승무원은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COKE?”

갑자기 콜라? 당황한 나는 작게 말했다. 오랜만에 영어를 썼더니 내 발음이 이해하지도 못할 정도가 되었나, 하는 묘한 자괴감과 함께.

“커피…….”

그러자 카트 맞은편에 있던 다른 승무원이 웃으며 뭔지 안다면서 컵을 가져갔다. 잠시 뒤 얼음이 가득 든 커피가 돌아왔다. 나는 그걸 홀짝거리며 소리와 빛을 모두 꺼놓은 다마고치를 했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에 선물 받아 키우기 시작한 녀석이었다. 죽으면 안 되니까. 그렇게 다마고치는 얼떨결에 남미 여행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밤이 깊어졌지만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원래도 난 비행기에서는 잠을 잘 못 자는 편이긴 하다. 그래도 상파울루에 도착하면 새벽이었고, 도착한 날부터 바로 여행을 시작해야 하니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던 길에 앞쪽 승객 한 사람이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자는 모습을 발견했다.

‘괜찮은데……?’

나도 자리로 돌아와 그대로 따라 해 보았다. 머리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쓰고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조금 따뜻해지기는 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되려 내 배가 부글거리는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렸다. 결국 자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잠들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몸부림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나자 창밖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긴 밤의 끝에서 비행기가 천천히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첫발을 디뎠다.


남미에.

브라질, 상파울루에.

이전 01화남미를 해치우러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