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을 못 해요. 메뉴 하나 고르는 데도 오래 걸립니다

결정마다 무게가 다르다. 그 차이를 모르면 모든 결정이 무겁다.

by시선
점심 메뉴 하나 고르는 데 십 분이 걸립니다. 회사에서 큰 결정을 해야 할 때는 며칠을 미룹니다. 틀릴까 봐 무서운 건지, 바카라임지기 싫은 건지 저도 모르겠어요. 남들은 어떻게 그렇게 금방 정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왜 이렇게 정하는 일이 어려울까요?


"오늘은 뭐 드실래요?" 팀원 둘이 횡단보도 앞에서 나를 돌아본다. 12시 5분이다. 김치찌개와 칼국수 사이에서 내 입이 먼저 내놓는 말은 정해져 있다. 아무거나 괜찮다. 그 말 뒤로 셋이 횡단보도를 건넜다가 다시 건너왔다. 신호가 두 번 바뀐다. 마지막에 한 사람이 "그럼 칼국수로 가요" 하고 앞장선다. 지금도 그렇다. 12시 10분까지 나는 대개 아무 말도 보태지 못한다.


큰 결정은 반대쪽이다. 결재판을 든 팀원이 바카라상 앞에 서 있으면 조금만 더 보자는 말이 먼저 나온다. 그렇게 사흘을 미루는 동안 내가 한 일은 후보를 늘린 것 하나다. 안이 둘이었는데 넷이 된다. 넷이 되면 셋을 버려야 하고, 버릴 일이 늘어나니 손이 더 무거워진다.


여러 해 전 정부 R&D 과제로 목욕의자 하나를 만든 일이 있다. 사업비가 12억이었다. 의자 하나에 붙기에는 무거운 숫자다. 나는 과제 총괄바카라임자였고, 우리는 디자인 회사라 시제품 제작은 외주업체에 맡겼다. 시제품을 만드는 몇 달 동안 우리는 밤마다 외주업체가 보내온 시제품을 작업대에 올려놓고 둘러앉았다. 좌판 높이를 오 밀리 낮추고, 다리 각도를 조금 더 벌리고, 물 빠지는 구멍을 하나 더 뚫었다. 좌판을 사포로 갈아 보고 고친 도면을 넘기면 며칠 뒤 새로 뽑은 좌판이 왔다. 그렇게 일곱 번을 고쳤다.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는다. 시험기관에 시료를 넘긴 뒤는 다르다. 성적서 한 장을 받으려면 하중, 미끄럼, 안정성, 재질 항목을 하나씩 따로 넘어야 했다. 미끄럼에서 떨어져 발 고무를 바꾸면 재질 시험을 다시 받아야 했고, 넘어짐을 막으려고 다리를 벌리면 하중 시험으로 돌아갔다. 한 항목에서 걸릴 때마다 외주업체에 도면을 다시 보내고, 시료를 다시 받고, 접수 순번을 다시 기다렸다. 그 숫자들이 성적서 한 장에 모두 찍히고 나서야 금형이 깎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다리 각도 하나를 바꾸려면 모든 항목의 시험을 다시 의뢰하고, 금형을 다시 깎고, 남은 협약 기간을 다시 세어야 한다. 성적서를 기다리던 몇 달 동안 내가 배운 것은 의자의 치수가 아니다. 고칠 수 있는 자리와 고칠 수 없는 자리가 공정 안에서 이미 나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 결정을 두 칸에 나눠 놓게 됐다. 한 칸은 작업대다. 틀려도 사포로 갈고 다시 뽑을 수 있다. 점심 메뉴, 주말에 볼 영화, 선물 포장지 색이 여기 들어간다. 다른 한 칸은 시험대다. 한 번 올라가면 되돌릴 수 없다. 사람을 두고 하는 말, 도장을 찍는 서류, 그만두겠다는 통보가 이 칸에 있다. 내 손이 무거워진 까닭은 두 칸을 나누지 않은 데 있었다. 우리는 점심 메뉴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고른다. 그러니 십 분이 걸린다. 작업대 칸을 따로 두고 나서야 결정이 싸졌다.


오늘 내가 미룬 그 일은 작업대 위에 있었을까, 시험대 위에 있었을까?


요즘 점심은 십 초 안에 말한다. 틀린 날도 있다. 지난주에는 내가 고른 국숫집이 문을 닫아 셋이 골목을 한 바퀴 돌았다. 그래도 그날 잃은 것은 15분이다. 그 15분을 아끼려고 나는 10분을 세워 두고 있었다. 시험대 쪽은 여전히 서툴다. 어제도 결재판 하나를 서랍에 넣어 두고 집에 왔다.


첫째, 정하기 전에 이 일이 되돌릴 수 있는 쪽인지 한 번 물어보기로 한다. 되돌릴 수 있으면 열을 세는 동안 고르고 열에서 손을 떼는 편이 낫다. 열을 세는 일은 오늘 저녁 식탁에서도 할 수 있다.


둘째, 작은 결정에서 '아무거나'를 빼 보는 것부터 시작해도 괜찮다. 저녁 메뉴를 누가 물으면 둘 중 하나를 소리 내어 말해 본다. 내 입으로 고른 끼니가 쌓이면 고르는 일이 조금 가벼워진다.


셋째, 되돌릴 수 없는 일은 하루를 묵히되 그 하루를 후보를 줄이는 쪽에 쓰는 편이 낫다. 종이에 안을 셋 적고 잠들기 전에 하나를 지운다. 미루는 시간과 고르는 시간은 다르게 쓰인다. 흔한 실수가 하나 있다. 메뉴를 정하려고 표를 그리는 일이다. 표가 완성될 무렵이면 식당 앞에 줄이 길어져 있다.


틀려도 되는 일이 생각보다 많다. 오늘 저녁 한 끼부터 그렇다.




▷ 오늘 하나만 · 저녁 메뉴를 먼저 한 가지 소리 내어 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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