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에서 침묵은 동의로 기록된다

회의에서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서명이다.

by시선

회의록 파일을 연 것은 나흘 뒤였다. 스크롤을 내리다 세 번째 줄에서 손이 멈췄다.


"이견 없음. 원안대로 진행"


그 줄 위에 참석자 이름이 일곱 개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은 네 번째였다. 나는 그 회의에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의 회의실 화면에는 제품 렌더링이 넉 장 떠 있었다. 사람들은 모서리 곡률 이야기를 했고, 손에 쥐었을 때의 두께 이야기를 했다. 누가 "이 그레이가 좀 무겁지 않아요?" 하고 물었고, 맞은편에서 "무거운 게 맞아요, 윗면이 비어서" 하고 받았다. 나는 그 말을 따라갔다. 따라가기는 했는데, 끼어들 자리를 못 찾았다.


내가 걸린 것은 색이 아니었다. 넉 장 중 두 번째 안은 하우징에 분할선이 하나 더 생기는 안이었고, 그러면 금형이 한 벌 더 들어간다. 그 일정으로 가면 시제품을 만들어 확인하는 일을 한 번밖에 못 한다. 나는 그 생각을 노트 구석에 적었다. 적고 나서 펜을 놓았다.


입을 다문 이유는 단순했다. 그 방에서 선을 긋지 않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디자이너들을 꾸리고, 일을 따 오고, 일정을 짜는 것은 내 몫이지만 형태를 판단하는 눈은 그들의 것이다. 형태가 오가는 자리에 총괄이 일정을 끼워 넣으면 디자이너들의 이야기를 자르고 들어오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다음 사람이 말할 때를 기다렸고, 그다음 사람이 말할 때도 기다렸다. 기다리는 동안 회의가 끝났다.


두 달 뒤, 시제품은 예정보다 하루 늦게 들어왔고 확인은 한 번으로 끝났다. 결합부 유격 하나와 버튼 위치 하나를 못 잡았다. 둘 다 금형을 고치고 나서야 보였다. 그 2개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누군가 물었다.


"그때 일정 얘기, 아무도 안 했었나요?"


했었다. 노트 구석에다.


그날 회의록을 다시 열어 봤다. 참석자 7명 가운데 6명의 이름이 본문 어딘가에 한 번씩 더 나와 있었다. 누구는 곡률을 걱정했고, 누구는 단가를 물었다. 내 이름은 맨 위 명단에만 있었다. 그 문서 안에서 나는 그날 회의에 들어간 적이 없는 사람과 똑같이 생겼다.


회의록을 쓰는 사람에게는 악의가 없다. 그 사람은 들린 것을 적는다. 고개를 갸웃한 것은 들리지 않고, 표정이 굳은 것도 들리지 않는다. 손으로 쓰든 녹음을 풀든 같다. 소리가 난 것만 글자가 된다. 그래서 회의록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 남는다. 말한 사람, 그리고 말하지 않아서 반대하지 않은 사람.


우리가 말을 아끼는 이유는 게으름이 아닐 때가 많다. 대개 자격의 문제다. 이 방에서 나보다 이걸 잘 아는 사람이 다섯인데 지금 입을 열면 모르는 티가 난다. 그 셈은 빠르고, 맞는 것처럼 느껴진다. 한 번 맞아떨어지고 나면 다음 회의에서도 같은 자리에 앉는다.


그 셈에는 빠진 값이 하나 있다. 내가 입을 열지 않아도 결정은 나를 비켜 가지 않는다. 회의실에서 정해진 일정은 두 달 뒤 내 바카라상 위로 돌아온다. 말하지 않은 값은 말하지 않은 사람이 치른다.


몇 해 전, 어머니가 사고로 크게 다치셔서 병원 복도에서 수술을 기다린 적이 있다. 그 복도에서 나는 아무 자격이 없었다. 뼈에 대해 아는 것도, 의사 선생님께 보탤 말도 없었다. 그래도 할 일은 있었다. 전화를 걸어 기도를 부탁드리는 일, 그건 그 자리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자격이 없다는 것과 할 일이 없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그 복도에서 배운 것을 회의실까지 가져오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회의도 다르지 않다.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장 잘 아는 것이 아니라, 나만 알고 있는 것이다. 그날 형태를 아는 사람은 다섯이었지만, 시제품을 몇 번 만들어 볼 수 있는지 세어 본 사람은 나 하나였다.


그래도 입을 다물면 회의록에 이름이 한 줄에만 남는다. 참석 줄이다. 그 방에 있었지만 그 결정에는 없었던 사람의 자리. 참석 줄은 출석을 증명하고, 발언 줄은 판단을 증명한다. 우리는 참석 줄에 이름을 올리려고 회의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나오고 나면 대개 그 줄에만 남아 있다.


그날 그 방에서 내가 할 수 있었던 일과, 그것이 회의록에 남는지를 나란히 놓아 보면 이렇다.



나는 앞의 셋을 다 했고, 마지막 하나만 하지 않았다. 기록으로 넘어가는 것은 그 하나뿐이었다. 종이에 적어 둔 것도, 눈으로 주고받은 것도, 회의가 끝난 뒤에 한 말도 회의록으로는 넘어가지 않는다.


지난 분기에 들어갔던 회의를 하나만 떠올려 본다. 그 방에서 나만 알고 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을 소리 내어 말했다면 지금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말할 자리를 그 자리에서 찾으려고 하면 대개 늦는다. 회의가 시작되면 머리는 듣는 일에 다 쓰이고, 그 와중에 문장까지 짓기는 어렵다. 그래서 나는 회의실에 들어가기 전에 종이 한 장을 쓴다. 수첩 한 면이면 되고, 회의 자료 뒷장 여백이어도 된다. 채우는 데 1분이 걸린다.


회의 전 메모 3문항

언제 - 여러 안건 가운데 어느 안건에서 말할 것인가

몇 번째로 - 그 안건에서 몇 번째쯤 말할 것인가

무엇을 - 이 방에서 나만 알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날 렌더링 회의에 이 종이를 들고 들어갔다면 이렇게 적혔을 것이다.

언제 - 디자인 안 이야기가 끝나고 일정 이야기로 넘어갈 때

몇 번째로 - 두세 번째쯤

무엇을 - 두 번째 안을 고르면 시제품을 한 번밖에 확인하지 못한다는 것


첫째 칸을 채우려면 회의 자료를 한 번은 미리 봐야 한다. 안건이 다섯 줄이면 그중 내 일과 맞닿은 줄에 동그라미를 친다. 그 안건을 다룰 때가 내가 말할 때다. 자료가 회의 10분 전에 오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제목만 보고 짐작해서 적는다. 틀려도 손해 볼 것이 없다.


세 줄을 채우고 나면 종이 맨 아래에 한 줄을 더 쓴다. 오늘 이 회의에서 내가 남길 한 문장이다.


"두 번째 안으로 가면 시제품을 한 번밖에 확인하지 못합니다. 그 한 번에 무엇을 볼지만 정해 두면 좋겠습니다."


두 문장이다. 미리 써 둔 한 줄이 있으면 손이 올라가기 전에 입이 준비된다. 회의에서 말을 못 하는 사람은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할 말을 그 자리에서 문장으로 만들다가 때를 놓치는 사람일 때가 많다.


둘째 칸이 제일 낯설어 보일지 모르겠다. 몇 번째로 말하느냐가 무슨 상관인가 싶다. 상관이 있다. 첫 번째 발언은 분위기를 정해 버려서 뒤에 오는 말이 전부 그 말에 대고 찬반을 붙이는 모양이 된다. 다섯 번째부터는 판이 이미 기울어 있어서, 그때 꺼내는 말은 의견이 아니라 딴지로 들린다. 둘째나 셋째는 아직 아무것도 굳지 않았고, 앞사람 말에 얹어서 시작할 수 있다. "방금 말씀하신 것에 하나만 더하면" 하고 여는 자리가 거기다.


언젠가 한 팀원이 회의가 끝난 뒤에 물었다. "아까 그 얘기, 맨 처음에 하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요?" 나는 둘째로 말했고, 앞사람 말에 얹어서 열었다. 맨 처음에 꺼냈다면 그 말은 내 의견으로 남았겠지만, 둘째로 꺼내니 우리 의견이 되었다.


세 문항을 다 못 채우는 날도 있다. 그럴 때는 셋째 칸만 채운다. 이 방에서 나만 아는 것 하나. 그것만 손에 있으면 나머지는 회의 안에서 정해진다.


종이를 들고 들어가도 말할 때를 놓치는 자리는 있다. 나는 같은 자리에서 여러 번 놓쳤다.


제일 자주 놓친 곳은 회의 끝자락이었다. 다 듣고 나서 말하려다 보니 그렇게 된다. 회의 오십 분째, 사람들이 노트북을 덮기 시작하고 누군가 의자를 뒤로 민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손을 든다. 그 자리에서 나온 말은 내용과 상관없이 회의를 늘이는 말이 된다. 맞는 말이어도 사람들은 내용을 듣지 않는다. 시계를 본다. 듣는 쪽 얼굴을 보면 안다. 나도 그 얼굴을 여러 번 봤다.


그다음은 복도였다. 회의실 문이 닫히고, 정수기 앞에서 종이컵을 들고 "사실 저는 좀 그렇던데요" 하고 말한다. 종이컵 하나 비우는 동안 같은 편이 둘 생긴다. 기분은 풀린다. 회의록은 한 글자도 바뀌지 않는다.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내가 회의 안에서는 말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알게 된다.


가장 알아채기 어려운 곳은 내 머릿속이었다. 결론까지 다 지어 놓고 꺼내려다 보니 언제나 한 박자 늦는다. 회의에서 오가는 말의 절반은 완성품이 아니다. "이건 제가 확인을 못 했는데요" 하고 여는 말도 기록에는 그대로 남는다. 다듬어지지 않은 한 문장이, 다듬는 동안 놓친 열 문장보다 낫다.


1-3-1

1분 - 회의 전에 종이 한 장을 채우는 시간

3문항 - 언제, 몇 번째로, 무엇을

1문장 - 그날 소리 내어 남길 말


나도 아직 다 하지 못한다. 임원이 셋 넘게 앉은 자리에서는 그 종이를 꺼내지 못하고, 셋째 칸을 채워 두고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있다. 지난주에도 한 번 그랬다. 종이는 가방 앞주머니에 늘 들어 있고, 꺼내지 못한 날에는 회의가 끝날 때까지 거기서 접힌 채로 있다. 그 회의록에서 내 이름은 또 참석 줄에만 있었다.


지난달 회의에서 팀원 하나가 한 문장을 말했다. 일정 쪽 숫자였고, 목소리가 조금 떨렸고, 아무도 반박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그 친구는 괜한 말을 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틀 뒤에 회의록을 열어 봤다. 그 문장이 그대로 한 줄로 적혀 있었고, 앞에 이름이 붙어 있었다. 참석 줄이 아니었다.



두 번째 사규 제10조 회의에서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서명이다. 기록에는 말하지 않은 반대가 남지 않는다.

화,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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