론강에 빠진 별들

by싱클레어

이 글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서 시작된 저의 개인적인 상상과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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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ncent van Gogh, <The starry night>, 1888, 오르세미술관(출처:Artvee)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하늘로 떠나자고 했던 게 기억나?“ 영길이 물었다.


“그럼, 기억하지.” 순애가 대답했다.


프랑스 론강을 따라 걷다가, 둘은 잠시 멈춰 섰다. 칠흑 같은 어둠의 가면을 쓴 론강 위에 노란색 띠들이 반짝이며 넘실거렸다. 그들이 프랑스에서 사는 근 50년간 수도 없이 론강을 걸었지만, 이렇게 밝은 별빛은 처음이었다. 별이 너무나도 밝은 것이, 마치 영원히 꺼지지 않는 가로등을 온 하늘에 수놓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았다. 목 뒤가 뻐근해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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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길과 순애는 스무 살에 처음 만났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순애는 어머니를 도와 나물을 캐고 있었다. 영길은 그날, 그 시간, 쪼그리고 앉아서 송골송골 맺힌 땀을 연신 닦아가며 나물을 캐는 순애를 우연히 발견했다. 그때 그는 사랑에 빠졌다. 나물을 캐고 있는 어여쁜 여자.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었던, 난생처음 경험해 보는 즐거움이었다. 그는 순애의 옆에 함께 쪼그리고 앉았고,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순애의 어머니에게 그 모습을 들켜 도망갔지만, 그 이후로 그는 매일 순애를 찾아갔다. 사랑이란, 사람에게 꿈과 용기를, 그리고 열정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곧 결혼을 했다. 순애의 나이, 고작 23살이었다. 영길도 순애와 같은 나이였다. 그들은 결혼을 하자마자 ‘영미‘라는 딸을 낳았고, 그 후로도 순애는 세 명의 아이를 더 낳았다. 영미, 영수, 영자, 영철. 그들은 영길과 순애에게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어느 아침, 영길은 순애를 불렀다. 아이들 모르게, 그들은 방으로 들어갔다.


“프랑스로 가자, 순애야. 그곳으로 가고 싶어.” 영길은 쭈뼛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프랑스라니?” 순애는 한국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이곳은 그녀의 터전이었다.


“내가 꼭 먹여 살릴게. 걱정하지마.” 영길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순애는 따지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그의 의견을 존중했고, 그를 믿었다.


영길과 순애,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은 두려움과 설렘을 안고 프랑스 파리로 향했다.


그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언어부터 문제였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빠르게 프랑스어를 배웠지만, 영어조차도 할 수 없었던 순애에게 프랑스어는 외계어처럼 보였다. 신기했던 점은, 영길이었다. 그는 불어를 할 줄 알았다.


“어떻게 할 줄 아는거야?” 순애가 얼이 빠진 표정으로 물었다.


“사실 내 꿈이었어. 어릴 때부터 나중에 꼭 프랑스에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거든. 빈센트 반 고흐가 살았던 곳, 아를에서. 그래서 정말 어린 시절부터 혼자 독학했어.“ 영길이 웃었다.


영길은 실제로 불어를 정말 잘했다. 그는 곧 번역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에겐 경력이 없었지만, 한 번 번역한 바카라이 불티나게 팔렸고, 그 기회를 잡아, 그는 파리에서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그는 오전엔 수업을 듣고, 오후엔 한인마트를 운영했다. 순애는 오전에 마트를 바카라임졌다.


어느 순간부터, 한인마트를 운영하지 않아도 먹고살 만큼 경제력이 생긴 두 사람은, 불어를 곧잘 구사하는 네 명의 아이들을 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순애는 한국이 그리웠지만, 점점 프랑스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바게트와 크로와상, 센강, 에펠탑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독립을 한 후엔 순애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이제 그녀는 나이가 들었다고 느꼈다. 영길과 순애가 센강을 걷던 도중, 갑자기 영길이 순애의 손을 꼭 잡고 그의 앞으로 그녀를 돌려세웠다.


“아를에 가자.” 그의 그 한 마디는, 반 고흐를 너무나도 사랑하던 그의 한 마디는, 그와 그녀를 고대 로마의 도시였던 아를로 이끌었다.


번역가인 그에게는 더 이상 사는 도시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순애와 함께 아를에 정착해, 글을 번역하고, 론강을 매일 걸었다. 가끔은 아이들이 파리에서 찾아오기도 했다. 순애는 자글자글 생긴 주름들을 바라보며 세월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영길이 잠시 미팅을 위해 밖에 나간 날, 순애는 장미꽃을 사러 집을 나섰다. 그녀는 집 앞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도로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주위로 자동차들이 빠르게 달리고, 중앙선에 간신히 걸쳐 앉아있는 강아지는 도와달라는 듯, 순애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는 파란 불이 되자마자 강아지에게 다가갔다. 그 순간, 작은 자동차 한 대가 그녀를 가볍게 쳤다. 빠른 속도가 아니었지만, 나이가 예순을 향해가는 그녀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녀는 강아지를 품에 꼭 안고 도로 한가운데 쓰러졌다.


병원에 도착한 영길은 거의 뛰다시피 순애의 병실로 들어갔다. 그를 가장 먼저 맞아주는 것은 강아지였다. 그는 꼬리를 흔들고 있었고, 그 뒤로 순애가 누워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영길이 놀라서 손을 떨며 말했다.


“자동차에 부딪혔네. 조금 아팠어, 여보.” 붕대를 감은 다리를 괜스레 만지작거리며 순애가 말했다.


“큰일 날 뻔했잖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어..” 영길은 순애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았다.


순애는 다행히 곧 퇴원을 했지만, 그 후로 관절이 시큰거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대신, 귀여운 강아지 한 마리를 집에 들이게 되었으니, 괜찮아, 그녀는 홀로 생각했다.


강아지의 이름은 론이었다. 론강에서 이름을 딴, 론. 강아지는 어느 곳이나 순애와 영길을 따라다녔다.


70살 생일을 맞은 어느 날, 순애는 삶에 대해 생각했다. 삶, 왜 삶이라는 것이 주어졌을까. 그녀는 70년 평생 그것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물 흐르는 대로, 론강이 흘러가는 것처럼, 그녀는 자연스럽게 살아왔다. 영길을 만났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사랑하는 모국을 떠나 프랑스까지 와서 지금껏 살고 있다. 이젠 아이들은 본인들의 삶을 꾸려가고 있고, 나와 영길, 그리고 론만이 이곳, 아를에서 살고 있다. 아를에서 살겠다는 결심은 영길의 선택이었지만, 순애의 선택이기도 했다. 순애가 그것이 싫었다면, 아를에서의 삶은 사실 성립할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녀는 그 모든 선택들이 그녀를 이곳까지 이끌었다는 생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매일 론강을 걷는다. 론강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밤이면 항상 몇 십 개의 별들이 론강 아래로 빠지곤 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원래 그랬던 것처럼, 그녀는 그저 살아갔다.


20대, 그 청춘에 그녀는 영길과 약속을 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자고. 그게 가능한 일일까? 사고가 나지 않는 이상 거의 불가능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와 그녀는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험에 따르면, 인생은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니까.


80살이 된 오늘, 영길과 순애는 밤 10시, 론강을 걷다가 강에 비친 노란색 별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곁에 있어준 서로에게 눈빛으로 감사한다, 사랑한다, 존경한다.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던 노부부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스무 살이었던, 쪼그리고 앉아서 나물을 캐던 어여쁜 여자를, 그리고 불어를 할 줄 안다며 웃으면서 자신감 있게 말하던 젊은 남자를 본다. 더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사랑의 결실로 태어난, 이제는 중년이 되어버린 작은 네 명의 아이들을 본다. 이게 삶이야. 삶은 자연스러운 거야. 마치 하늘에 뜬 별들이 강에 자연스럽게 착지하듯이.


순애는 영길의 팔에 팔짱을 끼고, 조용한 발걸음을 집으로 내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