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6월 2일은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선생 순도 128주기입니다. 해월 선생이 1898년 4월 5일(음)에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는 과정을 동학(천도교) 교단의 관점에서 증언한 100년 전 최초의 글을 2회에 걸쳐 소개합니다.
해월신사의 수형(受刑) 전후 실기(하)
-[신인간] 통권14호, 1926.7.20.[7월호]
조기간 [주해 - 박길수 신인간사 주간]
[필자-조지간-주] 우리 교를 낳아 놓은 어머니 되시는 세 분 스승은 다 같이 와석종신(臥席終身, 제명을 다하고 편안히 자리에 누워서 죽음-편집자주)을 못하시고 우리 도를 위하여 형을 받으시었다.
그런 때문에 우리 교우들은 삼세 교조가 형을 받던 날을 당할 때마다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대신사가 형을 받으신 대구장를 그리워하는 동시에 해월신사가 형을 받으시던 육군법원(陸軍法院, 육군법원이 아니라 ‘좌감옥-좌포청 처형장’이었다-편집자주. 육군법원은 해월신사 순도 이후 바뀐 이름이다.)은 어디쯤인가? 하는 생각이 우리 교우로서는 누구나 다 같이 평소의 궁금하던 일이다.
그래서 이번 해월신사 수형 제29년(1927) 기념 되는 지난 6월 2일을 기회로 하여 해월 사모님과 특히 그 당시의 전후 일을 같이 보시던, 현재 우리 교 종법사 이종훈 씨를 모시고 청년당에서 해월신사 수형지(受刑地) 참관회(參觀會)를 주최하게 되어서 해월신사께서 갇혀 계시던 감옥 자리(서소문)와 공판을 받으시던 평리원 자리(고등법원-현 종로2가 제일은행 본점)와 교형을 받으시던 육군법원 자리(좌포청-좌감옥 터 - 현 단성사 터 옆)와 광희문 밖 신사의 신체를 버리시었던 자리(당시 공동묘지)를 낱낱이 참관하며, 기타 그 당시의 전후 사실을 듣게 되었다.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차근차근히 하여 보자.
이종훈 씨는 날마다 김준식 집에 내왕하므로 신사께서 언제 재판 받으러 가시는 것을 알고, 그날이면 새벽 조반을 하시고서는 그 감옥 문 밖에 미리미리 가서 이리저리 거닐면서 기다리다가 열시나 열한 시쯤 되면 신사께서 나오심을 보게 되는데, 신사께서 아무리 기골이 장대하신 어른이실지라도 나이 칠십이 세나 되시고 몇달[수삭] 동안 옥중에 계시고 겸해서 병환으로 오랫동안 계신 어른으로서 목에다 전목칼을 쓰시고 나아오시는 얼굴을 보면 뼈가 저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하였다 한다.
일제강점기 모전교의 모습 - 현재 복원된 모전교는 원형과는 거리가 멀다.
그 전목칼이 하도 무거워서 옥졸 한 사람이 칼 앞머리를 받들고야 평리원으로 들어오시게 되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