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역자 주 - 아래 글은 [신인간] 통권398호, 1982년 5+6월(합병)호에 게재된 이재철 교수 ‘어린이날의 기점과 제정 정신’에 관한 글이다. 이 글은 당대 최고의 어린이 연구 전문가가 당시(그리고 지금도) 논란이 되고 있는 ‘어린이날’의 기점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으로 표명한 최초의 본격적인 논설이다. 이 글이 천도교기관지인 [신인간에 실린 까닭에 슬롯적으로 파급력을 갖는 데는 한계가 있었으나, 최근 들어 슬롯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맥락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활성화되고 있다. 아래에 [신인간] 398호의 기사 전문을 소개한다.
왼쪽부터 1925년 어린이날 포스터(동아일보), 1933년 어린이날 포스터(조선중앙일보, 5월 첫 일요일), 5월 첫 일요일 어린이날(1932)
‘어린이날’의 기점과 그 제정 정신
-올해(1982) ‘어린이날’은 60회가 아니라 61회이다
이재철(단국대 교수, 아동문학, 문학박사)
스웨덴이 낳은 세계적인 교육자 엘렌케이(Ellen Key)가 “19세기는 장구한 전통적인 가부장제(家父長制) 속에서 여인을 눈뜨게 한 부인(婦人) 운동의 세기(世紀) 였다면、다음의 20세기는 무엇보다도 아동을 위한 세기 곧 아동의 자유와 권리가 최대한으로 인정되는 세기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 저 유명한 처술인 「아동(兒童)의 세기」를 쓴 것은 주지하다시피 1900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여론이 국제연맹에 의해 5개조의 「어린이 권리 선언」(제네바 선언)으로 채택된 것은 1924년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어린이 권리 인정〉은 그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다. 곧 1889년 11월에 이미 천도교 제2세교조인 최시형(崔時亨) 선생이 내수도문(內修道文) 제4조에서 “어린아이를 때리지 말라. 이는 한울님을 치는 것이니라.” 하여 아동인권을 명문화하였고、종내 그 사상은 천도 교소년회로 하여금 1922년 5월 1일으 기하여 ‘어린이의 날’ 기념식을 갖게 만들었기 때문이 다.
천도교소년회는 천도교청년회를 모태로 1921년 5월 1일 창립되었는데 천도교의 종지(宗旨)아래 만 16세 이하 소년의 지육(知育)·덕육(德育)·체육(體育)의 계발을 목적으로 “씩씩하고 참된 소년이 됩시다. 그리고 늘 서로 사랑하며 도와 갑시다.”라는 표어를 내걸고 어린이에게 존댓말을 쓰기로 하고 발족한 단체였다. 지도위원은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소춘(小春) 김기전(金起田) 두 분이었는데 이상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
* [어린이] 잡지 창간호(1923년 3월 20일) 첫 면 「오늘까지」 참조.
* ≪동아일보≫ 1921년 5월 22일자 「조직보도」 참조.
* [개벽] 1921년 10월호 「가하(可賀)할 소년계(小年界)의 자각(自覺)」 참조.
그러면 최초의 「어린이의 날」이 천도교소년회에서 어떻게 개최되었는가를 다음의 자료에서 좀더 상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자료 1] ≪동아일보≫ 1922년 5월 1일자 기사
10년 후 조선을 생각[慮]하라
-조선소년운동의 비롯(시작)으로
-금일 천도교소년회의 활동
희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 과거와 현재는 소용이 없고 그들에게는 오직 장래가 있을 뿐이다。더욱이 조선 사람은 과거와 현재에 무엇을 가졌는가. 설혹 지난 일과 당장 눈앞에 일이 화려하다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우리는 다만 내일과 내년의 화려한 희망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따라서 새로운 살림을 부르짖는 우리 슬롯도 장래를 위하여 사는 것이요, 장래가 곧 우리가 춤 출 때임은 누구나 다 같이 바라고 믿는 바이어니와 한 나라 한 슬롯나 한 집안의 장래를 맡은 사람은 누구인가. 곧 그 집안이나 그 슬롯나 그 나라의 아들딸(원: 아들-편집자)과 손자손녀(원: 딸-편집자)이다. 장래에 희망을 두고 어린이에게 장래를 맡기는 가정이나 슬롯에서 어찌 어린이의 일을 등한히 할 수가 있으며, 새 살림을 부르짓는 우리 슬롯에서는 과연 아들과 손자를 위하여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 옛날 일은 지나간 일이라 말할 필요가 없거니와 수년 이래로 우리의 부형(父兄)은 그 자손을 위하여 과연 전에 없던 애를 써 왔다. 다시 말하면 그 자제를 가르치기에 열심 하며 여러 가지로 자손의 안도에 노력한 것은 근래의 교육열과 향학열이 증명하는 바이다. 실로 경하(축하)할 현상이라 하려니와 아직도 우리의 부형 중에는 배우고자 하는 자식을 막아서 한강에 빠져 죽게 하는 완고한 일이 없지 아니한지라. 이러한 일을 볼 때에 뜻있는 자로서 누가 한숨을 쉬지 아니하며 눈물을 흘리지 아니하리오.
이에 느낌이 있는 천도교소년회에서는 어린이를 위하여 부모의 도움이 더욱 도탑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금일(5월 1일)을 기회로 삼아 ‘어린이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항상 십년 후의 조선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쓴 네 가지의 인쇄물을 시내에 배포하며, 그 소년회원이 거리거리에 늘어서서 취지를 선전할 터이라는데, 이러한 일은 조선소년운동의 처음이라 하겠으며, 다른 슬롯(부문)에서도 다수히 응원하여 “조선 사람의 십년 후의 일”을 위하여 노력하기를 바란다더라.
[자료 2] ≪동아일보≫ 1922년 5월 2일자 기사
가로(街路)에서 취지 선전
-자동차대와 창가대로 나누어
-어제 ‘어린이의 날’의 대선전
천도교소년회 주최의 소년보호운동(少年保護運動)은 예정과 같이 어제에 성대히 거행하였는데, 처음에는 당국의 양해를 얻지 못하여 매우 승강이를 하였으나, 오후 1시에 이르러 다행히 선전서의 배포와 시기가 선전의 허가를 얻게 되었으므로 그 회원 일동은 여러 대(隊)로 나뉘어 종로를 위시하여 탑골공원, 전동, 교동, 광화문통 기타 각처에서 창가(唱歌)를 하며 취지를 선전하는 동시에 한편으로 그 소년회와 형제의 관계가 있는 천도교청년회원 중의 유지와 소년회원이 연합하여 조직된 자동차선전대는 세 채의 자동차에 ‘어린이의 날’ ‘소년보호’ 등의 문구를 대서특서하여 붙이고 종로 큰길을 위시하여 시내 각처를 달려 ekslu 선전서를 뿌렸다는데, 동시에 인천에서도 이와 같이 하였으며 밤에는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그 소년회의 창립 1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거행하였으며, 어제 배포한 선전서는 크고 작은 것을 합하여 네 가지인데, 그중에 ‘어린이의 날’이라고 제목은 것을 원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더라.
1.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주십시오.
2.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3. 어린 사람에게 경어(敬語)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4. 어린 사람에게 수면(睡眠)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5.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6. 나쁜 구경을 시키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주십시오.
7. 장가와 시집 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이상의 두 자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나라 최초의 ‘어린이의 날’은 분명히 민족주의적 구국정신이 깔린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천도교소년회를 기반으로 형성되었고, 그것도 오늘날 ‘어린이날’의 기점으로 삼는 1923년보다 1년 먼저 이미 1922년 5월 1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1923년 5월 1일이 현재 ‘어린이날’의 기점으로 부각되고 있는가를 다시 자료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자료 3] [어린이] 제9권 6호(고 방정환 선생 추도호, 1931년 8월 20일)
이정호(李定鎬) 집필 ‘파란 많던 방정환 선생의 일생’
(전략) 방학 중에 귀국하시어 천도교회에서 뜻 맞는 이 몇 분과 상의하신 후 비로소 조선소년운동의 첫 봉화인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시고, 방학 기간이 찰 때까지 친히 나서셔서 열심히 회원을 모으고 조직을 튼튼히 하고 선전을 굉장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어린 사람에게 일체로 경어를 쓰도록 하셨습니다.
선생의 노력이 첫되지 않아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실 때에 즈음해서는 회원이 약 4, 500명이나 되고 기초도 큰 단체인 교회를 배경으로 하였기 때문에 제법 튼튼하게 자리가 잡혔습니다. 그 후 동경에 가신 후에도 자주 통신으로 지도자 여러분을 독려하여 회의 발전을 도모 노력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처처에서 소년회가 벌떼같이 일어나가 이를 성원하는 분들이 늘어갔습니다. (중략)
그러시다가 그 이듬해(1922) 봄에 역사적으로 기념할 ‘어린이날’ 운동을 제창하여 천도교소년회 명의로 이를 공포하자 전선(全鮮, 전 조선 = 전국) 소년단체는 물론이요 슬롯적으로 일반 어른들까지 이에 호응하여 자못 성황으로 제1회 기념을 마쳤습니다. (중략)
그 이듬해(1923) 봄에는 아주 학교를 완전히 마치시고 귀국하시어 개벽사에 정식 입사를 하시고 [어린이] 잡지와 어린이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해부터는 천도교소년회의 단독의 힘을 가지고는 어린이날 기념운동을 좀 더 원만하게하지 못할 것을 때달으시고 즉시 경성 40여 소년단체를 전부 망라하여 소년운동협회(少年運動協會)라는 기관을 조직하시고 대규모로 이 운동에 헌신적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운동 이론상 틀리는 일이 있어 운동협회 속에서 일부의 사람들이 탈퇴를 하여 <오월회(五月會)>라는 대립 단체를 만들어 일시적으로 운동사 여러 가지 지장과 혼란을 거듭하였었으나, 양편의 양보로 다시 서로 연합이 되어 ‘소년연합회(少年聯合會)’가 생기고 선생은 그 회의 중앙위원장으로 피선되어 또한 많은 정성과 노력을 바치셨습니다. (하략)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천도교소년회는 분명히 방정환 선생이 주도 창립하였고, 또 최초의 ‘어린이의 날’도 소파 선생 자신이 제창하신 것이며, 그 후의 ‘어린이날(1923년은 범슬롯적, 범국민적으로 ’어린이날‘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만들어 시행한 사실이 확연히 증명된 셈이다.
그러면 뒷날의 ‘어린이날’ 기념식이 어떤 정신에서 이룩되었는가를 1923년 5월 1일의 자료에서 다시 보기로 한다.
[자료 4] ≪동아일보≫ 1923년 5월 1일자 기사
오늘 어린이날
-어린이를 위하여 처음 축복
-오후 세 시에 전국에서 선전
‘어린이의 날’ - 5월 1일이 왔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어린이에게도 사람의 권리를 주는 동시에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돌아왔다. 몇몇 대 조상 때부터 ‘아해’나 ‘어른’이나 사람의 허물을 쓰고 사람으로 살지 못한 것은 우리의 골수에 박힌 원한이다. 지금에 우리 조선사람은 어른이나 아해가 누가 사람의 권리가 있으며 사람의 대우를 받는가 생각하면 실로 기가 막히는 일이다.
첫째, 먹는 것, 입을 것이 없고 편안히 쉴 집이 없는 터이라 사람 노릇을 하려 할지라도 할 수가 없는 것은 자연한 형세라. 이에 뜻있는 몇 사람의 발기로 일어나게 된 소년운동협회라는 곳에서
“젊은이나 늙은이는 이미 희망이 없다. 우리는 오직 나머지 힘을 다하여 가련한 우리 후생(後生) 되는 어린이에게 희망을 주고 생명의 길을 열어 주자.”
하는 취지로 오늘 - 5월 1일을 어린이의 날로 작정하여가지고 어린이를 위하여 힘을 합하여 일을 하자고 선전하는 동시에, 다만 하루의 짧은 시간이라도 그들에게 기쁨이 있게 하고 복이 있게 하자는 오늘이라 한다. 조선의 어린이여! 그대들에게 복이 있으라. 조선의 부형이여! 그대들에게 정성이 있으라.
행렬은 의례 금지
-소년운동협회 당국의 고심
-기타 계획은 예정대로 시행
오늘 어린이날의 기념과 선전에 대하여 이미 누차 보도한 바와 같이 소년운동협회에서는 그동안 여러 가지로 준비에 분주하였다. 당초의 계획으로는 오늘 오후 3시 2천여 명의 소년을 모아가지고 시내에서 굉장히 선전 행렬을 할 계획이었으나 행렬에 대하여는 상습적으로 금지의 수단을 쓰는 조선의 경찰 당국이라. 어찌 하가 되기를 바라리오. 부득이 중지치 아니치 못하게 되었고, 기타 계획은 대개 예정대로 하게 되었는데, 차례대로 보도하면 다음과 같다더라.
<기념 축하 -오후 3시부터 천도교당에서>
먼저 오늘 오후 3시에 소년운동협회의 간부와 기타 유지의 인솔하에 시내의 각 소년 단체 회원과 소학생 천여 명이 경운동 천도교당에 모여 ‘어린이날 기념 축하식’을 거행할 터인데, 주최자 편 어린이날에 대한 이야기가 있은 후, 어린이운동에 대한 선전(宣言) 낭독이 있을 터이요, 내빈의 축사가 있은 후 회장 안에서 선전지를 배포하고 폐회한 후, 시가로 나아가 선전할 터이라더라.
<12만 장 선전지 - 시가를 네 구로 가가호호에 배포>
시내의 선전은 선전지 12만 장을 네 구역에 나누어 가가호호에 배포할 터인데, 구역은 종로를 중심으로 네 거리를 표준하여 나누어가지고 각 구역을 다시 각 부로 나누어 1부에 50명씩 패를 짜가지고 가가호호에 배포할 터인데, 그 선전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더라.
별항 보도와 같이 오늘 시내에 배포할 선전서는 <어른에게 드리는 글>과 <ㅇ어린동무들에게>라는 두 가지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더라.
<어른에게 드리는 글>
一.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치어다보아 주시오.
一. 어린이를 늘 가까이 하시어 자주 이야기하여 주시오.
一.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一. 이발이나 목용, 의복 같은 것을 때 맞춰 하도록 하여 주시오.
一.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一. 산보와 원족(遠足, 소풍) 같은 것을 가끔가끔 시켜 주시오.
一. 어린이를 바카라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자세히 타일러 주시오.
一.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 만한 놀이터나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一. 대우주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도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 그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어린 동무들에게>
一.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一. 어른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一. 뒷간이나 담벽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 같은 것을 그리지 말기로 합시다.
一. 길가에서 떼를 지어 놀거나 유리 같은 것을 버리지 말기로 합시다.
一. 꽃이나 풀을 꺾지 말고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一. 전차나 기차에서는 어른에게 자리를 사양(양보)하기로 합시다.
一. 입은 꼭 다물고 몸은 바르게 가지기로 합시다.
<소년운동의 선언 - 세 가지 조건>
천도교당 안에서 거행할 기념식장에서 낭독할 소년운동 선은, 즉 ‘소년운동의 기초조항’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더라.
“소년운동의 기초조항”
본 소년운동협회는 이 어린이날의 첫 기념 되는 5월 1일인 오늘에 있어 고요히 생각하고 굳게 결심한 나머지 감히 아래와 같은 세 조건의 표방을 소리처 전하며, 이에 대한 천하 형제의 심심(深甚)한 주의와 공명과 또는 협동 실행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一.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二.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三. 어린이 그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한 각양의 가정 또는 슬롯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계해(1923) 5월 1일 소년운동협회
이상의 [자료 4]에서 ‘오늘 어린이날’ 기사 중 ‘어린이날’을 전해(1922년)의 ‘어린이의 날’이라고 한 것이라든지, 그다음 ‘사람의 대우를 하자고 떠드는 날이 돌아왔다’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분명히 1923년의 ‘어린이날’ 행사는 1922년의 계속임을 알 수 있고, 또 기사 내용이 대체로 1922년 5월 1일자 기사와 1923년 5월 1일자 기사가 같은 정신적 문맥 속에 있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특히 미래가 있고 미래를 바카라임질 어린이가 내일의 주인공임을 역설한 점 등)
뿐만 아니라 ‘기념 축하’ 대목에서 기념식이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어 어디까지나 천도교소년회가 중심이 된 것을 추측하기에 어렵지 않게 되어 있고, 특히 놀라운 것이 ‘어린 동무들에게’란 선전문은 얼마간 세부적 진일보를 보이고 있으나, ‘어른에게 드리는 글’은 전해의 [자료 2] 끝의 선전문과 거의 동일한 문맥임을 간파할 때, 1923년의 ‘어린이날’ 기념 정신은 천도교소년회 자체에서 단독으로 거행한 1922년의 ‘어린이의 날’ 기념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음이 명약관화하다.
또 [자료 4] 마지막의 ‘소년운동의 기초조항’ 세 항목은 김기전 선생이 쓴 <개벽운동과 합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개벽] 35호, 1923년 5월 1일 발행)의 소제목인 ‘조선 소년의 윤리적 압박’ ‘보다 심한 경제적 압박’ ‘이렇게 해방할 것이다’를 그대로 옮기고 있으니 천도교 사상이 ‘어린이날’ 제정의 정신이라 단언해도 과히 빛나간 속단은 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중요하고 그 처음의 정신이 소중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의 종교정신이 개인된 것이라고 그것을 적당히 다른 이야기로 얼버무리는 건 결국 역사의 은폐에 지나지 않는다.
정홍교(丁洪敎) 선생 중심의 <오월회>가 방정환 선생과 의견대립으로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우리나라 소년운동을 이끌어 간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또 <색동회>가 소파 선생의 어린이운동 정신을 구현하는 데 이바지한 공로를 가볍게 다룰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어린이날’의 기점은 천도교소년회에 있고, 도 그 정신이 천도교의 민족주의적 인내천 사상에 있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이 글로 우리나라 ‘어린이날’의 기점과 그 제정 정신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았으면 하는 게 필자의 솔직한 바람이다.
(정리, 교정 박길수 _신인간사 주간, 모시는사람들 대표)
*이재철(李在徹), 1931 - 2011 , 현대 , 문학가 , 사계(史溪). 경북 청도에서 태어난 이재철은 경북대 사범대를 졸업하고 1978년 단국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1997년 단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아동문학개론] [한국현대아동문학사] [세계아동문학대사전]을 펴내고 1976년에는 전문 계간지 [아동문학평론]을 창간하는 등 현대 한국 아동문학 이론의 개척자 역할을 했다. 이후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아동문학 도서 및 자료 2만여 점을 경희대학교에 기증, 사계아동문학관 및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를 개설하고 센터 소장을 역임했다. 1976년 아동문학평론사를 창립하여 계간지 『아동문학평론』을 창간하였으며, 한국아동문학학회회장직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