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일
바람이 결을 바꾸는 계절이 오면 사람들은 옷장을 열어 두터운 옷을 꺼낸다. 몸을 가리는 옷가지는 계절에 맞추어 손쉽게 바꿀 수 있지만, 영혼이 입고 있는 타인의 시선이라는 오래된 옷은 그리 쉽게 벗어던질 수 없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세상이 정해둔 여러 겹의 이름과 기대, 그리고 '바람직함'이라는 미명 아래 짜여진 타인의 소망을 겉옷처럼 입고 살아간다. 그것은 추위를 막아주는 든든한 방패가 되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나의 숨통을 조이는 무거운 굴레가 되기도 한다.
문득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이제는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도 되는 것일까.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지금의 나는 온전히 내 의지로 엮어낸 시간의 결과물인가,
아니면 타인의 욕망을 반영하는 정교한 거울에 불과한가.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고립된 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친 파도 속에서도 자신만의 닻을 내리는 일이다. 타인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때 삶은 표면적으로 평온하고 매끄러워 보일지 모른다. 갈등은 적고, 승인은 손쉽게 얻어진다. 하지만 그 안에서 진정한 나라는 존재는 조금씩 마모되어 마침내 희미한 그림자만 남게 된다. 타인의 찬사에 미소 지으면서도 허기짐을 느끼는 까닭은, 그 찬사가 내가 아닌 내가 연기한 인물에게 향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완벽해져야 한다는 환상을 깨뜨리는 용기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결점을 메우고 단점을 보완하여 완성된 도자기 같은 인간이 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의 아름다움은 매끈한 균일함에 있지 않다. 오뚝이처럼 오직 내 중심을 지키며 흔들리는 모습, 서툴고 깨지기 쉬운 자신의 약점까지도 한 부분으로 껴안는 태도 속에 인간 존엄의 정수가 담겨 있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한계를 정직하게 직시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실패했을 때조차 그 실패를 타인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얻은 훈장으로 여길 수 있는 성숙함이다.
원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선택의 주권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오늘 하루를 어떻게 채울지, 어떤 가치에 내 소중한 에너지를 기울일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혁명이 아닐지도 모른다. 타인의 무례한 요구에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 타인의 평가보다 내 안의 정적에 귀 기울이는 순간, 그리고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일에 순수한 몰입을 바치는 그 소박한 순간들 속에서 내가 원하는 삶의 기초가 놓인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흐르지만,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느냐에 따라 삶의 질감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남의 인생을 대리 연기하며 사는 일은 아무리 화려할지라도 서글픈 방관자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그 길이 자갈밭이고 외로울지라도, 내 발자국으로 직접 길을 내며 걷는 자만이 삶의 참된 주인이 된다.
우리는 모두 단 한 번뿐인 이 삶이라는 무대에 서 있다. 관객의 박수갈채보다 중요한 것은, 무대가 내린 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나는 오늘, 온전히 나로서 존재했는가?
타인이 원하는 인형이 되기를 거부하고, 내 안의 목소리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 나만의 색깔과 결을 지닌 채 단단하게 뿌리내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세상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자, 내가 나 자신에게 바칠 수 있는 가장 나다운 삶일 것이다.
세상이 내게 입히려 했던 각잡힌 제복을 찢어 불태운다. 칭찬이라는 이름의 사탕발림과 바람직함이라는 단정한 밧줄을. 손짓하는 대로 걸어온 길 끝에서 나는 나를 잃어버린 유령이었다. 남의 박수갈채 속에서 미소 짓는 껍데기, 타인의 욕망을 베껴 적던 부지런한 손가락. 이제 그 화려한 감옥의 문을 내 손으로 부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꽃길을 걷는 상냥한 동화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 제 가슴을 갈라 짓눌린 숨통을 트는 처절한 야성이다. 비틀거려도 좋다. 남들이 지어준 매끄러운 길을 버리고 가시밭길에 내 피로 붉은 이정표를 새기리라. 내 실패는 타인의 공식이 틀렸음을 증명하는 나만의 고귀한 훈장이 될테니.
벼랑 끝에 홀로 서서 세상이 던지는 비난의 돌멩이를 온몸으로 받는다. 그 타격 속에서 깨어나는 내 안의 단단한 뼈대를 확인해 보려한다. 나는 이제 누군가의 인형이기를 거부한다. 내 눈물은 내가 흘리고 내 웃음은 내가 택하며 내 절망마저 온전히 내 손으로 껴안는 일이 가장 소중해졌다.
삶이 내게 건넨 가장 단단한 무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으로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갈 권리.
무대가 내리고 조명이 꺼진 뒤에도 홀로 밤하늘을 직시하는 야수의 눈빛으로,
나는 마침내 나라는 유일한 이야기를 남겨보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랬듯이, 오롯이, 내 발자국으로만.
이제 더는 세상이 정해준 이름으로 나를 부르지 않을 것이다.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든 내 걸음의 방향만은 내가 정할 것이다. 삶의 끝에 무엇이 남을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이 내가 선택한 나 자신이기를 바란다. 마침내 나로 살아냈다는 것, 그것 하나면 나의 생은 충분히 아름다울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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