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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사용 설명서를 찢었다

타인의 설계도 밖에서, 나의 문장을 시작하다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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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차가운 정적을 쓰다듬던 어느 늦은 밤, 나는 오래된 서랍 구석에서 노랗게 바랜 종이 뭉치를 꺼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세상을 기계처럼 돌리기 위해 내게 몰래 쥐여주었던 것, 바로 '내 인생의 사용 설명서’였다.


나의 십 대.

이 십 대.

그리고 삼십 대.

사십 대가 꽉 차있다.


그 서문에는 올바르게 사는 법, 길을 잃지 않는 법, 슬롯라는 거대한 태엽 시계의 작은 톱니바퀴로서 마찰 없이 마모되어 가는 법이 정갈한 문체로 적혀 있었다. 언젠가 나를 보호해 줄 울타리라 믿었던 그 단정한 규범들은, 돌이켜보니 내가 세계를 향해 뻗으려 했던 모서리들을 끊임없이 깎아내던 무딘 칼날에 불과했다. 정답으로 가득 찬 문장들은 아름다웠으나, 그 어떤 문장에서도 피 냄새나 흙내음, 혹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느끼는 무용한 아늑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명서는 완성된 삶을 약속했지만, 완성이라는 정적은 곧 죽음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종이의 양 끝을 잡았다. 서글픈 당위들과 타인의 눈동자로 가득 찬 페이지들을 향해 힘을 주었다.


스르륵.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쥐 죽은 듯 정적에 싸여 있던 방 안을 갈랐다. 그것은 타락의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한 존재가 비로소 자신의 궤도를 이탈하여 우주라는 무한한 허공으로 던져지는 순간의 웅장한 비명이었다. 지침서의 반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고, 그 자리에는 규정되지 않은 투명한 시간의 공백이 솟아올랐다.


설명서를 찢어발긴 손끝에 묻어난 종이 부스러기를 털어내며, 나는 비로소 창문을 열었다. 여전히 밤은 어두웠고, 길은 어디로도 이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보장된 탄탄대로를 벗어난 발밑에서 마침내 차가운 자갈의 감촉이, 축축한 풀이파리의 생명이 직접 느껴졌다.


우리는 정답을 이행하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질문하고, 방황하고, 사소한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한 감정에도 무너져 내리기 위해 살아간다. 찢겨 나간 종이 조각들은 이제 밤바람을 타고 아무런 지도도 그려져 있지 않은 세계의 수평선 너머로 날아갔다.


손바닥에는 이제 아무런 지시 사항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어둠과, 바람과, 나 자신의 불완전한 숨소리만이 텅 빈 공백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나의 첫 문장이 시작되고 있었다.

결정론적인 규범과 타인의 기대에서 벗어나, 불확실하지만 주체적인 존재로서의 삶을 선언하는 실존주의적 서사. 어느 순간부터 달라져 가는 것들을 기록했다.


문장이 시작되었다고 해서 지평선 위로 즉시 새벽이 밝아온 것은 아니었다.

설명서가 사라진 자리를 가장 먼저 채운 것은 눈부신 자유가 아니라, 목을 죄어오는 아득한 현기증이었다. 나를 옥죄던 규범의 서랍을 닫아버리자, 나를 지켜주던 안전한 벽체마저 함께 허물어졌음을 깨달았다. 오랫동안 남이 그어놓은 선을 따라 그리는 데 익숙해져 있던 손가락은, 아무런 가이드라인도 없는 흰 여백 앞에서 오한을 느끼듯 떨렸다.


바람은 나에게 어디로 가라 지시하지 않았다. 밤하늘의 별들 또한 차가운 빛을 발할 뿐, 나의 방황을 정당화해 주는 거창한 암시를 던져주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내가 선택한 진짜 세계의 얼굴이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는 세계, 어떤 해답도 미리 마련해두지 않은 엄정한 무(無)의 공간.


나는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찢긴 종이 조각들을 밟으며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파스칼이 말했던 '우주의 영원한 침묵'이 내 귓가를 맴돌았으나, 이제 그 침묵은 공포가 아닌 자유의 음향으로 들려왔다. 기계의 부속품처럼 정해진 경로를 매끄럽게 굴러가는 정교함 대신, 거친 자갈밭에 발이 찍히고 피가 맺히는 고통을 선택한 순간, 나는 비로소 살아있는 유기체가 되었다. 상처는 내가 정해진 궤도를 탈선했다는 증거이자, 내 삶에 새겨진 가장 정직한 훈장이었다.


나는 이제 인생을 ‘완성해야 할 작품’이 아닌, ‘끝없이 깨뜨려야 할 형틀’로 재정의한다.

완벽한 설계도는 건축가에게나 필요한 법이다. 스스로 길을 내는 방랑자에게 필요한 것은 정교한 지도가 아니라, 발 밑의 촉감을 느끼는 감각과 손에 쥐어진 작은 횃불 하나뿐이다. 비록 그 횃불이 내 주위 몇 미터의 어둠만을 겨우 밝힐지라도, 그 작은 빛의 원 안에서 내리는 모든 결정은 오롯이 나의 피와 살에서 흘러나온 결정(決定) 일 것이다.


저 멀리, 단 한 번도 누구의 발자국도 찍히지 않은 낯선 능선 위로 검푸른 새벽의 기운이 번져오기 시작한다.

나의 두 번째 문장은, 방황하는 모든 발걸음 자체가 이미 하나의 목적지라는 고백이다.


이제 서랍 구석에 뒹굴던 찢긴 종이 조각들을 모아 조용히 불을 붙인다.

올바른 정답이라 믿었던 문장들이, 나를 가두던 정교한 규범들이 까맣게 오그라들며 붉은 불꽃 속으로 스러져 간다. 연기는 밤하늘로 올라가 어떤 기하학적인 도형도 그리지 않은 채 허공으로 산산이 산화된다. 타버린 재는 바람을 따라 흩어지고, 마침내 내 손끝에는 타인의 지혜라는 이름의 찌꺼기마저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완전히 비워진 손, 완벽하게 정갈해진 무지(無知). 오히려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을 오래 가지려 노력한다.


설명서를 태운 잿더미 위에서 나는 나만의 언어를 줍기 시작한다.

그것은 타인의 입을 통해 기성품처럼 유통되던 매끄러운 단어들이 아니다. 짓무른 발바닥의 통증에서 얻은 ‘상처’라는 단어, 정답 없는 길목에서 마주친 고독 속에서 건져 올린 ‘평온’이라는 단어, 그리고 밤의 기운이 걷히며 어깨 위로 떨어지는 이슬의 차가움에서 배운 ‘존재’라는 단어다. 내 삶의 어휘집은 이제 정교한 학술서가 아니라, 비바람을 맞아 낡아버린 한 편의 서사시가 되어가고 있다.


인생이란 쓰기 위해 존재하는 백지가 아니라, 끊임없이 지워내고 찢어발김으로써 마침내 드러나는 단 하나의 뼈대다.


우리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관객이 아니라, 매 순간 시나리오 없는 무대 위에서 스스로의 피와 살로 배역을 빚어내는 희극이자 비극의 주연이다. 사용 설명서가 찢겨 나간 그 거친 균열 사이로, 마침내 내 숨결과 닮은 진짜 세상을 본다. 비틀거림은 나의 춤이 되었고, 길 잃음은 나의 정체성이 되었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 피를 토하듯 솟아오른다.

빛이 마침내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내 가슴팍을 정면으로 비춘다. 지도는 사라졌고, 지침서도 탄주(炭化)하여 부스러졌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깨어 있다.


이 방황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상관없다. 나라는 바카라의 마지막 장은, 타인의 펜이 아닌 오직 나의 마지막 숨결로 기록될 것이므로.


나는 찢어진 설명서의 파편을 뒤로하고, 햇살이 부서지는 낯선 들판을 향해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걸어 나간다. 그것이 세상이 바라보는 늦은 걸음이라도, 이제는 상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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