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빛
다를 수 밖에 없는 일이다.
같을 수도, 속도를 맞출 수도 없는, 각자의 열차를 몰고 있는 것이다.
레일이 놓인 곳은 비슷하나 거리가 다르고
서로의 속도가 다르다.
저마다 주유(注油)하는 시간이 다른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시간표처럼
저마다 멈춰서 다시 달리기 위해
각자의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이 다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타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 앞서가는 이의 등뒤에서 일어나는 먼지를 붉은 눈으로 바라보며, 자신이 딛는 발걸음이 너무 작거나 늦지 않은지 끊임없이 스스로를 가채질한다. 그러나 세계가 강요하는 일직선의 시간표는 거대한 착각이다. 자연의 어떤 생명도 남의 시계를 올려다보며 꽃을 피우지 않는다.
동토(凍土) 밑에 묻힌 씨앗은 모두 같은 날 눈을 뜨지 않는다. 어떤 씨앗은 첫 봄볕에 조급히 싹을 틔우지만, 어떤 씨앗은 땅속 가장 어두운 깊이에서 수천 번의 계절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늦게 트인 싹이 결코 열등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땅 밑의 수분을 더 깊이 머금고, 바위에 부딪혀 돌아가는 뿌리의 지도를 그리느라 자신만의 거대한 시간을 견뎌냈을 뿐이다. 나무가 높이 자라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남들보다 빠른 성장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에서 내려간 단단한 뿌리의 깊이다.
우리는 흔히 '보폭'만을 측정하려 하지만, 진정한 삶의 무게는 '밀도'에 있다. 남들과 같은 속도로 내달리는 동안 우리는 길가에 피어난 수많은 계절의 표정과, 발밑에서 나지막이 숨 쉬는 미세한 생명들의 안부를 잊고 지나친다. 빠르게 흘러가는 것들은 세상의 겉면만을 핥고 지나갈 뿐이지만, 천천히 걷는 자는 세상의 절벽과 단면에 새겨진 주름을 손끝으로 읽어낸다.
남들과는 다른 속도로 걷는다는 것은 낙오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이 정해놓은 일방통행의 트랙에서 벗어나, 나만의 지형을 만들어가는 고독하고도 숭고한 행위다. 시계 바늘의 단조로운 회전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세상은 단순한 이동의 대상이 아니라 온몸으로 삼켜야 할 경이로운 공간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그대의 발걸음이 더디다고 해서 스스로를 조급함의 절벽으로 몰아세우지 말라. 천천히 흐르는 강물이 바다에 도달하지 못하는 법은 없으며, 가장 늦게 문을 열고 나온 빛이 밤하늘의 가장 깊은 어둠을 가장 오래 비추는 법이다. 그대가 지나온 모든 멈춤과 머뭇거림은 버려진 시간이 아니라, 마침내 도달할 그곳의 풍경을 더욱 깊고 푸르게 만들어줄 거대한 침묵의 자산이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어떤 것들은 완성되기 위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는 증명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비로소 제 빛을 갖는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한때의 나를 부정하지 않아도 오늘의 내가 될 수 있다는 것. 지나온 계절을 미워하지 않고도 그 계절을 떠날 수 있다는 것. 삶은 끝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다만 설명할 수 없는 것들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을 내어 줄 뿐이다.
시간의 표면을 지치는 수많은 발자국 속에서, 당신의 발자국만이 오롯이 바닥의 깊이를 아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속도를 겨루는 정글에서는 타인을 추월하는 법만을 배우지만, 자기만의 속도를 아는 이는 정적 속에서 스스로와 화해하는 법을 배운다.
지도를 벗어난 이들이 흔히 길을 잃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사실은 자기만의 지형을 기르기 시작한 것이다. 타인의 속도에 맞추어 뛰는 삶은 정해진 목적지에 도달할지 몰라도, 도착한 그곳에 '나'는 남아있지 않는다. 자신을 놓쳐버린 완성은 화려할지언정 텅 비어있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보폭을 거부하고 나지막이 딛는 한 걸음. 그것은 거대한 수레바퀴의 회전에 던지는 가장 부드럽고도 단단한 균열이다. 천천히 쌓아 올린 시간은 유행이나 계절의 변화에 쉽게 흔들리지 않으며,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매 순간은 거대한 침묵 속의 찬가로 변한다.
당신이 지나온 더딘 길 위에 서린 먼지들, 망설임과 멈춤의 나날들은 결코 지워야 할 오점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라는 거대한 지층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고요한 세월의 겹이다.
그러니 멈춰 섰다고 해서, 혹은 남들보다 뒤처졌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당신은 지금 낙오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만의 삶을 오롯이 조각하는 중이다.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가장 깊은 여운을 남기는 문장이 대개 천천히 쓰였듯, 당신의 삶 역시 자신만의 아름다운 속도로 완성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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