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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은 의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기억하지 않는 세계와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하여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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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나무에서 떨어진 뒤 자신이 어디에 내려앉았는지 알지 못하고, 한때 제 몸을 흔들던 바람의 이름도 묻지 않는다. 비에 젖은 의자의 차가운 표면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또 다른 바람이 불면 아무런 미련 없이 자리를 옮긴다. 떠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에게 이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낙엽은 떨어짐으로써 이미 떠났고, 떠남으로써 더는 잃을 것이 없는 존재가 된다.


나는 한동안 그 단순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은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너무 오래 기억한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나누었던 말보다 그 사람이 일어나 의자를 밀어 넣던 소리를 더 오래 간직하기도 한다. 식탁 위에 남겨진 물 잔의 둥근 자국, 문이 닫힌 뒤에도 한동안 흔들리던 손잡이, 함께 걷던 길에서 어느 한쪽의 발걸음만 먼저 멈추었던 순간. 사건은 끝났는데 사물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사물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사람이 그것들에게 자신의 시간을 맡겨 놓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날에는 오래된 집의 문고리를 만지는 일만으로도 한 생애의 절반이 되돌아온다. 손바닥에 닿는 금속의 차가움은 예전과 다르지 않지만, 그것을 잡던 사람의 손은 이제 없다. 문고리는 수없이 많은 손을 거쳤으면서도 누구의 온기도 보관하지 않는다. 다만 계절이 바뀔 때마다 차가워지고, 여름에는 조금 뜨거워질 뿐이다. 그 무심한 반복을 우리는 변하지 않았다고 부르고, 변하지 않은 것을 마주할 때마다 변해 버린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가끔 사물의 무정함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잔인한 진실인지 생각한다. 우리가 죽은 뒤에도 세계는 계속될 것이다. 아침은 창문에 도착하고, 빗물은 경사진 지붕을 따라 흘러내리고, 어느 나무의 잎은 아직 이름을 갖기도 전에 푸르게 자랄 것이다. 우리가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얼굴도 언젠가는 낯선 사람의 기억 속에서조차 희미해질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잊기로 결정하지 않는다. 애초에 우리를 기억하겠다고 약속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함께 갔던 장소를 피하거나, 반대로 그곳을 일부러 찾아간다. 누군가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벤치가 우리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한 시절의 입구가 된다. 같은 나무 아래에서 다른 사람들이 웃고, 같은 탁자 위에서 누군가 새로운 커피를 마신다. 우리가 떠난 자리에 다른 삶이 도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 당연함 앞에서 마음은 자주 모욕당한 것처럼 굳어진다. 우리는 자신이 겪은 일이 세계의 일부이기를 바라는 동시에, 그 일이 세계 전체를 바꾸어 놓기를 바란다. 적어도 한 사람의 부재만큼은 세상의 모양을 달라지게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의자는 여전히 의자다.

누군가의 체중을 받아 내고, 일어서는 순간 비워지고, 다시 다른 사람을 기다린다. 그것은 기다림을 알지 못하면서 기다리는 형상을 하고 있다. 나는 그 형상 때문에 의자 앞에서 오래 머문 적이 있다. 비에 젖은 검은 철제 의자 위로 갈색 낙엽 몇 장이 흩어져 있었고, 그 옆의 탁자에는 뚜껑을 닫은 커피 한 잔이 놓여 있었다. 낮은 구름 사이로 빛이 내려와 젖은 표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다. 누군가 사진을 찍고, 누군가 그 곁을 지나가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 한 사람이 앉아 있다가 막 떠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실제로 누군가가 다녀갔다는 증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의자 위의 낙엽은 사람의 흔적을 설명하지 않았고, 커피는 누구의 것인지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비어 있다는 사실이 그곳에 어떤 존재가 있었을 가능성을 불러냈다. 나는 빈자리를 볼 때마다 그곳을 채웠던 것을 상상한다. 떠난 사람의 뒷모습을 그리고, 끝내하지 못한 말을 되짚고, 이제는 확인할 수 없는 마음에 뒤늦게 문장을 붙인다. 어쩌면 기억이란 지나간 일을 보존하는 능력이 아니라, 지나간 일에 끝없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습관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과거에 대한 현재의 해석을 기억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던 말이 세월이 흐른 뒤 상처가 되고, 당시에는 견딜 수 없었던 이별이 훗날 어떤 삶을 가능하게 한 사건으로 바뀌기도 한다. 기억은 보관된 물건처럼 제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의 안에서 계속 형태를 바꾼다. 그러므로 오래된 기억을 꺼내 들 때마다 우리는 같은 과거를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 과거를 지나온 또 다른 자신과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이 조금 두렵다. 그렇다면 내가 그토록 소중하게 간직해 온 것들 가운데 어디까지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고, 어디부터가 잃어버린 뒤에 만들어진 것일까. 그 사람의 표정은 정말 그랬을까. 마지막 인사는 내가 기억하는 것처럼 담담했을까. 그날의 햇빛은 정말 그렇게 아름다웠을까.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기억의 가장자리를 조금씩 허문다. 그러나 그 질문들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과거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불완전하게 기억하기 때문에 지나간 것을 다시 사랑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완벽하게 보존된 과거에는 새로운 마음이 들어설 자리가 없을 테니까.


낙엽은 그런 수고를 하지 않는다.

떨어진 잎은 자신이 떠나온 나무를 원망하지 않는다. 땅에 닿았다고 해서 자신의 생을 실패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과 흙으로 돌아가는 일 사이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지 않는다. 잎은 한때 나무의 일부였고, 이제는 나무 바깥에 있다. 그 두 사실 사이에 변명도 후회도 없다. 인간의 눈에는 그것이 쓸쓸한 소멸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쓸쓸함은 낙엽이 아니라 낙엽을 바라보는 우리 쪽에 있는 감정일 것이다.


우리는 모든 떠남에서 설명을 요구한다. 왜 떠났는지, 무엇이 부족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사랑이 달라졌는지 알아야만 그 일을 끝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이유를 알면 받아들일 수 있고, 받아들이면 잊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해했다고 해서 덜 아픈 일이 없고, 충분히 아파했다고 해서 저절로 끝나는 일도 없다. 어떤 관계는 아무도 잘못하지 않은 채 끝나며, 어떤 생은 아무런 결론도 남기지 않은 채 다른 생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불완전하다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인간이 세계에 요구하는 지나친 친절인지도 모른다.


비가 그친 뒤, 의자 위의 물방울들이 빛을 받아 작게 흔들린다. 바람이 불자 낙엽 한 장이 탁자 끝에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것은 잠시 허공에 머물다가 바닥의 다른 잎들 사이에 내려앉는다. 아무도 그 움직임을 기록하지 않는다. 어디에서 왔는지 묻는 사람도,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없다. 낙엽은 그저 다른 낙엽들 사이에 놓인다. 서로의 이름을 모르면서도 한 곳에 모여 있는 것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비로소 어떤 종류의 평온을 상상한다. 잊히는 것이 반드시 사라지는 일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방식과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인간은 의미를 만들어 자신을 지탱하고, 세계는 의미가 없어도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했던 사람의 이름을 오래 발음하지만, 그 이름을 품고 있는 동안에도 계절은 제 할 일을 한다. 그렇다고 사랑이 계절보다 작았던 것은 아니다. 세계가 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의 슬픔이 사소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계의 지속과 인간의 상실이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뿐이다. 한 사람의 죽음 뒤에도 봄이 온다는 것은 봄이 잔인하다는 뜻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봄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새로 배워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어쩌면 성숙이라는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기억하는 일만으로 세계를 붙들어 둘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지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이 영원히 머물러야 한다는 의무가 아니며, 어떤 시간을 소중히 여겼다는 사실은 그 시간이 반복되어야 한다는 요구도 아니다. 우리는 한때 존재했던 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은 채 다음 날의 문을 열 수 있을 뿐이다.


해가 조금 더 기울었다. 젖은 탁자는 천천히 빛을 잃어 갔고, 커피가 놓여 있던 자리에는 둥근 물자국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자국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것이 마를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물은 증발할 것이고, 의자는 다시 마를 것이며, 누군가는 그 위에 앉을 것이다.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생각했는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어쩌면 삶이 우리에게 허락하는 가장 조용한 위로일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겪은 일을 대신 기억해 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더는 붙들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조금씩 데려간다. 빗물은 흔적을 씻고, 바람은 잎을 옮기고, 빛은 사물의 표면에서 물러난다. 어느 날 문득 그리움이 전보다 희미해졌다는 사실을 깨닫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거짓이었다는 증거가 아니다. 다만 사랑했던 사람이 없는 세계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는 뜻일 것이다.


나는 의자에 기대어 앉지는 않았다. 그저 바라만 보았다. 발밑에는 아직 젖은 낙엽들이 겹쳐 있었고, 그중 한 장이 신발 끝에 붙었다가 몇 걸음 뒤 떨어졌다. 나는 돌아가 그것을 주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 잎을 하찮게 여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이 나와 함께한 몇 걸음은 실제로 있었고, 내가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 이상을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세상에는 있었다.


낙엽은 의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때 그 의자에 앉아 있던 인간은 자신이 떠난 자리마저 기억하려 한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돌아갈 곳을 마음속에 남겨 두고, 더는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뒤늦은 말을 건네며, 이미 끝난 계절을 다시 불러내기 위해 수많은 밤을 쓴다.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이라면, 나는 그 어리석음의 다른 이름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세계가 기억하지 않는 것을 기억하려는 마음. 사라진 것에 사라졌다는 이유만으로 마지막 말을 허락하지 않는 마음.


다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기억하고 싶다. 떠난 사람을 붙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이 떠난 뒤에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빈자리를 다시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빈자리가 빈 채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기 위해. 언젠가 내 기억마저 흐려지고, 내가 사랑했던 것들의 이름이 더는 입술에 오르지 않는 날이 오더라도, 그때의 삶이 지금의 삶을 배신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낙엽은 의자를 기억하지 않는다. 의자도 낙엽을 기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때 잎은 그 위에 내려앉았고, 한때 의자는 그것을 받아 주었다. 비가 내렸고, 빛이 지나갔으며, 그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세계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이제 그 사실을 슬픔의 반대편에서 바라보려 한다.

모든 것이 기억되어야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들은 기억되지 않더라도, 한때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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