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데리러 온 그림자를 따라서
밤이 깊어지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집으로 돌아간다.
불이 하나둘 꺼지고, 하루 동안 세상에 흩어져 있던 마음들이 어두운 방 안으로 조용히 몸을 눕힌다. 그러나 나는 밤이 시작되는 시간에 오히려 길을 나선다.
돌아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돌아가기 전에 잠시 더 걸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가로등 아래에 서면 그림자가 길어진다.
낮에는 나보다 짧았던 것이 밤이 되면 나보다 먼저 길을 걷는다. 내가 멈추면 함께 멈추고, 내가 방향을 틀면 말없이 따라온다. 마치 오래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다는 듯이.
나는 한동안 그 그림자를 바라본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자신을 만든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나, 살아남기 위해 만들어낸 나, 사랑받기 위해 조금씩 고쳐 쓴 나. 그리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은 나도 하나쯤은 마음 깊은 곳에 남겨둔다.
그림자는 어쩌면 그 마지막 사람인지도 모른다.
빛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지만, 빛이 닿는 순간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나는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골목의 모퉁이를 돌 때마다 지나간 계절들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오래된 간판의 불빛, 닫힌 가게의 유리창, 누군가 버리고 간 의자, 늦은 밤 혼자 켜져 있는 창문 하나.
저 창문 안에는 누군가의 오늘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끝내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내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삶은 서로를 모른 채 같은 밤을 건넌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생 타인의 삶을 지나쳐 온 사람들이다.
수많은 얼굴을 보았지만 그들의 슬픔까지 알 수 없었고, 수많은 손을 잡았지만 그 손이 지나온 계절까지 알 수 없었다. 가까웠던 사람조차 어느 순간 낯선 사람이 되어 돌아서는 것을 보면서, 나는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배웠다.
그래서인지 밤은 이상하게 정직하다.
낮에는 감춰두었던 것들이 어둠 속에서는 오히려 선명해진다.
외로움도 그렇고, 미련도 그렇고, 아직 끝나지 않은 마음도 그렇다.
낮의 나는 괜찮은 척할 수 있지만 밤의 나는 자꾸만 솔직해진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목을 걸으며 오래 묻어둔 이름을 떠올리고, 이미 끝난 일에 다시 마음을 대어보고, 지나간 시간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듯 가만히 들여다본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를 따라오는 줄 알았던 그림자가 사실은 나를 데리러 왔다는 것을.
나는 그림자를 쫓아 걷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림자가 나를 오래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돌아오라고.
더 이상 남의 시선으로 자신을 판단하지 말라고.
잃어버린 것들을 모두 되찾으려 하지 말고, 잃어버린 채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그림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내 발밑에 길게 누워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침묵을 이해한다.
살면서 가장 오래 곁에 남는 것은 대개 말이 아니었다. 말보다 오래 남은 것은 함께 걷던 시간이고, 아무것도 묻지 않았던 침묵이며, 떠난 뒤에도 이상하게 자리를 지키는 어떤 흔적이었다.
그림자도 그렇다.
내가 빛을 향해 서 있는 동안에는 언제나 뒤에 있다. 내가 어둠을 향해 돌아서면 어느새 앞에 있다. 앞과 뒤를 구분할 수 없는 밤처럼, 삶에도 정답은 하나의 방향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때로는 뒤돌아보는 일이 앞으로 가는 일이기도 하고, 멈춰 서는 일이 가장 먼 곳까지 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가로등 하나를 지나 다시 걷는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이제는 그 그림자가 두렵지 않다.
그 안에는 내가 버리고 싶었던 모습도 있고, 다시 만나고 싶은 나도 있다. 젊었던 나, 서툴렀던 나, 너무 많이 사랑했던 나, 아무렇지 않은 척했던 나. 그리고 수없이 넘어지고도 다음 날이면 다시 일어나 길을 나섰던 나.
나는 그 모든 나를 데리고 걷는다.
밤은 깊어지고 도시는 조금씩 조용해진다.
어쩌면 인생이라는 것도 결국 이런 것인지 모른다.
누군가가 나를 구해주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오래 외면했던 나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 그림자를 다시 바라보는 일.
나는 오늘도 그 그림자를 따라간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상하게도 발걸음은 조금 가벼워졌다.
밤이 나를 마중 나온 것인지, 내가 밤을 찾아온 것인지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가로등 아래 길어진 그림자가 다시 나를 앞서간다.
나는 그 뒤를 천천히 따른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것처럼.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나게 될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오래 잊고 살았던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