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 Olive

초록이 오래 살아남은 뒤에 갖게 되는 색

by구시안


ca5a3633-fddb-440d-b34b-7e2bdcb6dda3.png

해가 가장 깊숙이 스며들었다가 차분히 침전된 자리, 그 오래된 고요의 채도다. 눈부신 빛의 환멸을 견뎌낸 잎사귀들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빚어낸 빛깔로, 푸름과 누르스름함이 서로의 체온을 나누다 마침내 엉겨 붙은 밀도 높은 그늘이다.


그것은 생명이 치열하게 불타오른 뒤에 남겨진 가장 격렬하고도 온전한 평온이다. 쉽게 꺾이지 않는 단단함이 수액처럼 스며 있어 겉보기엔 무심한 듯 스쳐 지나가지만, 그 속에는 폭풍우를 견뎌낸 뿌리의 기억과 메마른 대지의 숨결이 겹겹이 옹이져 있다.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 안고도 결코 타 죽지 않는 자의 침묵처럼, 묵직하고도 서늘한 무게감을 품고 있다.


때로는 세월이 켜켜이 쌓인 올리브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그 색의 진짜 깊이를 만난다. 화려한 채색을 모두 지워낸 자리, 낡은 가죽 일기장이나 빛바랜 군복의 깃처럼 지나간 시간의 온기가 가장 정직하게 배어 있는 곳. 요란하지 않으나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 묵묵한 색은, 상처마저도 은은한 향기로 우려낼 줄 아는 자의 깊고 푸른 눈빛을 닮았다.


이 색을 바라보는 것은 잘 익은 열매가 스스로 땅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마음에 가까웁다. 조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계절이 오면 저절로 무르익는 진중함. 세상의 모든 소란이 걷힌 후, 가장 단단하고 진실한 본질만이 남은 자리에 고요히 머무는 오래된 품격이다.


올리브는 초록이 오래 살아남은 끝에 도착하는 색이다.
막 돋아난 잎의 초록처럼 명랑하지도, 짙은 숲의 초록처럼 완강하지도 않다. 초록 안에 흙이 조금 섞이고, 햇빛이 조금 빠지고, 시간이 얇게 내려앉은 색. 그래서 올리브를 보고 있으면 식물이 아니라 식물이 견뎌낸 계절이 먼저 떠오른다.


올리브는 젖은 초록보다 건조하다.
싱그러운 생명보다 오래된 생명에 가깝다. 비가 그친 뒤의 잎이 아니라,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제 몸 안의 수분을 놓지 않는 잎. 밝음과 어둠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고, 그 둘이 섞여 만들어지는 낮은 온도의 색이다.


이 색에는 이상하게도 말수가 적은 온기가 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구시안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자각(自覺). 나의 시들지 않는 문학이라는 꽃잎을 위해. brunch + 351日.

1,685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최근 30일간 118개의 멤버십 콘텐츠 발행
  • 총 119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이전 03화차콜 : Charco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