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덕유산 양악호 둘레길

진달래 꽃에 취하다

by루미상지


어젯밤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봄비가 아침까지 내린다.

‘오늘은 쉬는 걸까?’

문자가 오기를 기다리는데 모임의 대장에게는 아무 연락이 없다. 소식이 없으면 걷는다는 뜻이다.

‘그래 걷자. 비 오는 날도 걷는 거야.’

서둘러 도시락을 싸고, 간식으로 먹을 딸기와 참외를 조금 챙겨 집을 나섰다.

“어서 와!”

먼저 온 동무들이 손을 흔들었다. 비가 와서인지 걸음 동무들의 숫자가 확 줄었다. 우리는 우비를 입고 우산을 쓰고 걷기 시작했다. 보슬비를 맞으며 장수군과 무주군 경계에 있는 무주 둘레길 4코스를 걸었다. 장수군 계북면 파곡(파파실 마을)을 지나 들길을 한참 걸어 한적한 마을 산자락에 있는 정인승 기념관 앞에 도착했다. 건재 정인승 선생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가 우리나라의 얼과 말, 글을 말살해 우리를 뿌리 없는 민족으로 만들려고 할 때 우리 글을 지킨 국어학자, 교육자, 애국자였다고 한다. 기념관에는 한평생 우리말을 지키려고 애썼던 한 학자의 간절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정인승 기념관을 나와 토옥동 계곡을 따라 걷다 양악 호수 밑에 있는 정자에 도착했다. 멋스러운 용연정에서 시원한 물소리를 들으며 도시락을 먹었다. 비 내리는 봄날, 경치 좋은 정자에서 먹는 도시락은 어느 뷔페식당보다 맛있었다. 그새 보리가 언제 따 왔는지 진달래꽃을 한 줌 꺼내 놓았다.

“아름다운 봄날이 가고 있는데 우리가 두견주라도 마셔줘야 이 봄을 보낼 수 있지 않겠어요?”

쌀뜨물 같은 뽀얀 막걸리 위에 진달래 꽃잎을 띄웠다. 누구는 진달래주, 누구는 두견주라 했다. 알코올을 전혀 못 하는 단비는 진달래주 한 모금에 양 볼이 발개졌다. 넙죽 한잔 받아 마신 나도 진달래꽃처럼 활짝 피어났다.



점심을 먹고 나자,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개고 햇살이 비췄다. 비 갠 뒤의 상큼한 숲길을 걸어 양악호 둘레길로 들어서는데 내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산속은 온통 화사한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요즈음은 진달래 보기가 힘들었는데 군락으로 피어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나에게 진달래는 순한 시골 고향의 맛이고, 철쭉은 강하고 세련된 도시의 맛이다. 요즈음 아이들은 눈부신 색깔의 철쭉에 익숙해져 있다. 아파트 화단에는 화려한 철쭉이 무리 지어 피어있는 것이다.

어느 순간 우리에게 고향이 서서히 잊혀갔듯이 진달래도 사라져 가고 있다. 그래서 더 반가운 마음에 노래가 절로 나왔다.

"진달래 먹고 물장구치고 다람뒤 쫓던 어린 시절에~~~"

어린 시절, 4월이면 앞산 뒷산은 분홍 진달래꽃으로 뒤덮였다. 우리는 산속을 뛰어다니며 진달래꽃을 따 먹고, 숨바꼭질하고, 볼록 솟아오른 이름 모를 묘 위에서 미끄럼틀 타며 놀았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집에 들어갈 때면 옷에는 잔풀이나 지푸라기 같은 검불이 잔뜩 묻어있었다. 엄마에게 매일 혼나면서도 소쩍새 소리를 들으며 단잠을 잤고 다음 날이면 또 신나게 뛰어놀았다.

진달래꽃을 보니 노랑 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고 시집간 예쁜 이모가 떠올랐다. 1990년에 결혼한 나도 분홍 저고리에 연두 치마를 입었다. 얼마나 소박하고 순수한 우리 멋이었던가!

물기를 머금고 햇살에 반짝이는 진달래꽃의 환한 미소를 눈과 가슴, 휴대폰에 담느라 걸음 동무들과 속도 맞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뒤처졌다. 멀리서 찍고, 가까이서 찍고, 확대해서도 찍었다.

일 년 동안 미국에서 혼자 살며 외로운 봄을 맞이했을 때도 화려한 철쭉꽃은 많이 피어났다. 하지만 진달래는 그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 순한 연분홍빛 진달래는 꾸밈없이 소박한 내 정서에 꼭 맞는 꽃이다.

달콤한 봄비 속에 진달래가 피고 소쩍새가 울고 있다. 물오른 나무들이 저마다 잎을 돋우는 잎새달 4월이 지나고 푸른 달 5월이 오면 앞산에서는 뻐꾸기 노랫소리도 들리겠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비 그친 하늘에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떠있다. 내 발걸음은 하얀 구름처럼 가볍다.


두견주, 진달래주



* 덕유산 둘레길 4코스: 마암교~농소리~문성~파곡~정인승 기념관~용연정(점심)~양악호~당저~마암교 (11.5km)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https://omn.kr/2hz0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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