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 닿지 않는 세계
회색 다리 옆에는 한 공원이 있었다. 초록빛이라곤 하나도 없는, 회색빛 공원이었다. 불이라도 났나, 이리엘은 생각하며 공원으로 날아갔다. 불이 났으면 불꽃의 흔적이 하나라도 있어야 한다. 불꽃의 흔적이 하나도 없었으나 공원은 이미 타버린 듯했다. 잿빛 침묵 속에 놓인 것은 깨진 벤치와 버려진 돗자리, 생을 잃은 나무와 색 바랜 꽃들뿐이었다.
이리엘은 회색의 침묵에 말을 잃었다. 버려진 공원이라니. 이리엘은 흑백의 공원을 향해 내려갔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던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발끝에서 펼쳐졌다. 마른나무는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뻗고 있었다. 잿빛 풀은 목이 꺾였고, 향기롭던 꽃들은 잡초처럼 엉켜 있었다. 버려진 공원은 오래된 기록처럼 구겨지고 벗겨져 있었고, 깨진 벤치는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이리엘은 조금씩 잿빛 흙을 밟았다. 잠시 멈춰 선 이리엘은 아무 소리도 없는 공원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지나가도 풀은 흔들리지 않았다. 마치 이곳은 처음부터 살아 있지 않았던 세계였던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이리엘은 벤치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에 남는 순간, 날카로운 결이 피부를 갈랐다.
“아야.”
피가 번졌다. 그 위로 떨어진 눈물은 흙에 스며들지 못하고 그대로 남았다. 이리엘은 그 둘을 내려다보았다. 섞이지도, 사라지지도 않았다. 잠시 후 시선을 돌리자, 벤치 틈 사이에는 오래된 쓰레기들이 끼어 있었다. 이곳이 아직 살아 있던 시간의 잔해 같았다.
"공원이 조용히 우는 것 같아. 나뭇가지도, 나뭇잎도, 풀잎, 꽃까지 다 고개를 숙였어." 이리엘이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맥이 끊긴 이 공원에는 잔상이 남아 있었다. 옛날에 아이들이 뛰어노며 웃고 떠들던 소리가. 버려진 공원은 마치 공허와도 같았다. 생기라곤 하나 없는 그곳은 마을의 쓰레기장에도 있던 길고양이마저도 나타나지 않는 고요한 땅이었다.
───
이리엘은 회색빛 공원을 거닐었다.
“허어… 여기도 야야들이 놀던 곳인디…”
걷던 발이 멈춘 곳에는,
죽은 풀 앞에 쭈그려 앉아 혼잣말을 하는 노인이 있었다.
"음? 넌 뭐 하는 숨이냐?"
노인은 이리엘의 발소리에 놀라, 천천히 이리엘 쪽을 돌아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저는 여행 중이에요." 이리엘이 대답했다.
"그려. 여게 좀 둘러봤고?" 노인은 미소를 지었다. 이리엘이 장해 보이는 것 같았다.
"네. 다 죽은 것 같았어요. … 너무 쓸쓸해 보여요."
"허허, 그려. 눈에 보이는 게 전부면 그리 보일 게야." 노인이 허허 웃으며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글치만 맥이 끊긴 공원이라고 다 뒤진 건 아니여. 사람 손때가 묻은지 오래라 이리 낡고 어둡고 더러운 기지. 여짝을 보기라."
노인이 말하며 노인 앞에 있는 꺾인 풀 떼를 손으로 커튼 열듯 걷었다.
"와..." 이리엘이 감탄을 했다.
"너무 예뻐요! 새싹이 푸릇하네요!"
노인이 걷었던 풀 떼 뒤에는 향기로운 새싹과 구근이 자라고 있었다.
"야야, 공원이 버려졌다고 다 맥이 끊긴 건 아니여. 나는 이 공원이 버려져서 삭아갈 때도 이렇게 삭고 나서도 기다렸디, 여린 것들이 다시 비집고 튀어나오기를." 노인이 말하며 죽은 풀 더미를 새싹과 구근이 자라나는 연둣빛 땅에 묻었다.
"그걸 왜 땅에 묻나요?"
"죽은 풀들은 이눔덜의 밑뿌리 아니겠냐. 나는 내 뮤뿌리에게 힘을 주기는커녕 짐만 주었디. 그러니 니라도 니 뮤뿌리에게 힘을 주라는 뜻 이제."
뮤뿌리 : 우라스티 세계관에서 '후손'이라는 뜻의 방언
"음... 거름으로요?" 이리엘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려, 야야."
**
"할아버지는 계속 여기에 계실 거예요?"
이리엘이 노인의 허연 얼굴을 바라보았다.
"글씨, 이눔덜도 잘 자라고 있고, 저짝의 저눔덜도 튀어나온 지 오래라 내도 모르제."
"그렇군요."
"야야, 또 어디 가는 기냐?"
"네. 세상 구경을 덜 끝낸 것 같아요."
"야야, 세상을 돌아봤는디, 세상을 어뜨케 생각하디?"
"... 음... 어... 아!
세상은요, 코스모스 같아요."
"코스모스? 그거 꽃 아니디?"
"네. 꽃이에요. 코스모스는 같이 피어도 서로 닿진 않아요."
"기래서 그렇케 생각하는 거디?"
"네." 이리엘이 미소를 지었다.
이리엘은 잿빛 공원을 둘러보았다.
"이제 가는 거디?"
"네, 할아버지."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할아버지."
이리엘은 노인과 작별인사를 하고 다시 날아올랐다.
노인은 그런 이리엘에게 미소를 보내며 중얼거렸다.
"내가... 할아비가... 미안허이… 니게 짐짝을 줘서.
… 그래도 안심했이. 네가 있어 다행허이."
노인은 저 멀리 나아가는 이리엘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 이리엘."
노인은 어린 풀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다 서서히 히미해졌다.
노인이 서 있던 자리에는 삭은 풀 한 가닥이 누워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