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묻어가도 괜찮아

by김솔솔

기시감이 드는 문장 앞에서

바카라을 읽다가 한 문장 앞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일본의 에세이스트 이치다 노리코의 바카라 《어른이 되어 그만둔 것》에는 ‘묻어가기를 그만두다’라는 표현이 나온다. 프리랜서 작가인 저자는 편집자와 일할 때 늘 그들의 눈치를 보며, 속으로는 다른 안을 좋아하면서도 입 밖으로는 편집자가 고른 안을 지지하며 슬그머니 묻어갔다고 고백한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 강한 기시감이 일었다. 회사 생활을 하던 시절, 내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회사는 조직이다. 마케팅이나 브랜딩 전략을 짜다 보면 하나의 방향만 존재할 수는 없다. 수많은 회의를 거쳐 치열하게 A안, B안, C안 같은 여러 가지 대안을 만들어 의사결정자인 '윗분'이 모인 보고 자리에 올린다.

“그래서, OO 씨는 어떤 안이 가장 좋은 것 같아요?”


상사의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머릿속은 복잡하게 굴러간다. 질문은 단순한 것 같지만, 그 뒤에 숨은 상사의 진짜 선호와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오감과 육감이 총동원한다. 내 판단이 이미 서 있더라도 웬만하면 상사의 코드에 맞춰주고, 그가 결정한 안에 확신을 한 방울 더 얹어주는 방식으로 슬그머니 의견을 얹는다. 소위 ‘답정너’ 판에서 안전한 대세를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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