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하한선의 시대

구체적이고 미련한 사랑

by은수

요즘 뉴스는 슬프다. 어떤 비극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오늘 뉴스 영상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인 관리자에게 뺨을 맞고 머리끄덩이를 잡혔다. 또 얼마 전엔 태어난 지 백일이 갓 지난 아기가 제 어미에게 속절없이 던져지고 밟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외에도 뉴스엔 눈과 귀를 의심할 기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 광경을 구경꾼처럼 보고 있다 보면, 마음의 지지대 하나가 툭, 하고 부러지는 것 같다.


그럴 때 나는 비로소 우리가 문명이라는 얇은 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상식과 도덕이 사실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살얼음판이었다는 걸 깨닫는 것이다.


인간은 당연한 듯 삶의 상한선을 쫓아 산다. 우리는 늘 상한선을 쫓아 살라고 배우고 가르쳤다. 더 높이 올라가는 법을 배워왔다. 더 좋은 대학, 더 높은 자리, 많은 것을 가지는 삶. 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멈춰 서는 마음이나 부끄러움을 아는 감각처럼 발밑의 토대가 무너질 때, 상한선도 그 의미를 잃고 만다.

결국, 인간이 가장 인간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하한선을 지키는 일이었다. 우리는 스스로가 믿던 하한선이 무너지는 광경을 목도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의 소년 ‘시릴‘은 부단히 페달을 밟는다. 유일한 보호자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소년의 발놀림은 필사적이다. 특히, 강도짓으로 빼앗은 돈을 자기를 버린 아버지에게 가져다주는 장면은 아프다.

어린 소년이 오로지 사랑받기 위해, 인간의 최후 보루라 할 하한선을 쉽게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소년의 아버지는 아들을 짐으로 여기며 아들이 아끼던 자전거를 팔아치우고 아들마저 버렸다. 그 행위는 유일한 양육자인 아버지로서의 하한선을 스스로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소년의 세계를 지탱하던 마지막 하한선까지 가차 없이 밀어버린 비정한 선언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우리에게 절망만을 남기지 않는다. 소년이 사력을 다해 넘으려 했던 그 하한선 위에, 주말 위탁모인 미용실 아줌마 ‘사만다’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소년이 휘두른 흉기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소년의 자전거 뒷자리를 놓지 않는다.

사만다의 환대는 무너진 소년의 발밑에 기꺼이 자신의 삶을 밀어 넣어 새로운 지지대가 되어주는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우린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왔나 돌아보게 된다. 부모는 온갖 노동과 허드렛일을 마다치 않으면서도, 자식만큼은 '사람을 부리는 위치에 있기를 바라오지 않았나.

어쩌다 보니 우리가 말하는 성공의 척도가 '사람을 얼마나 다스리고 부리는가'에 맞춰 있던 것은 아닐까? 그러는 사이 우리 아이들은 타인에게 공감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있는 거라면!

우리는 아이들에게 더 높이 올라가는 법은 가르쳤지만, 어디까지 내려가면 안 되는지를 가르치지 않은 건 아닐까?

사람을 이기는 법을 배우는 동안, 어쩌면 사람을 아끼는 법은 충분히 배우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

가난한 집을 떠나, 사람을 부리는 법만 배운 아이들은 과연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될까?


하한선이 무너진 시대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더 높은 상한선을 향해 질주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만다처럼, 타인의 무너진 경계 앞에 멈춰 서서 '사람은 부리는 존재가 아니라 아끼는 존재'임을 온몸으로 증명해 내는 것. 그 구체적이고도 미련한 사랑만이, 우리 시대의 마지막 보루인 하한선을 다시 세우는 유일한 희망은 아닐까?


[나를 달래는 기록 #13]

오늘도 여지없이 믿었던 하한선이 깨지더니, 상상해 본 적 없는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하지만 내 감각까지 함께 무너지게 두지 않기로 한다. 타인의 고통 앞에서 한 번 더 멈춰 서고, 사소한 잘못 앞에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으로 남자고 다짐하며, 오늘의 나를 달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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