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마침내, 그때가 되어

고사리처럼

by은수

그날, 나는 제주 공항 3번 출입구 앞에 서 있었다.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출입구 문이 열릴 때마다 여행을 마친 사람들 무리가 대합실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적당히 지친 얼굴엔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안도와 들뜬 기색이 겹쳐 있었다. 나는 한 발짝 비켜 선 자리에 서서 손에 들고 있던 묵직한 가방끈을 한 번 더 꽉 쥐었다.


지난해 10월, 서울 여행에서 30여 년 만에 고모를 만났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가끔 안부를 주고받았다. 그런 고모로부터 며칠 전, 제주로 피정을 왔다는 문자가 왔다. 그것도 큰고모와 함께 말이다. 일가친척이 없는 내게 고모들은 내 어린 시절을 기억해 줄 유일한 존재였다.

'단체 일정이라 따로 만날 수는 없지만, 네가 있는 제주에 와 있어.‘ 그 한 문장만으로도 내 마음은 이미 고모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고모들이 돌아가는 날, 공항에서 잠깐이나마 얼굴을 보고 손 한 번은 잡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때 떠오른 것이 ‘고사리’였다.


제주의 4월은 ‘고사리 장마’와 함께 시작된다. 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 땅이 습기를 머금으면, 아무것도 없던 것처럼 보이던 자리에서 고사리는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몇 해 전, 나는 나의 ‘고사리 스승’을 따라 새벽 오름에 오른 적이 있었다. 주위는 어둡기만 했고, 초보에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엎드리다시피 땅을 더듬어 고사리를 하나씩 겨우 찾았다. 그런데 어둠이 걷히기 시작할 즈음, 조금 전까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자리에서 통통한 고사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마치, 고사리는 보이지 않는 시간을 지나야 만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고모들과의 만남도 그 새벽의 사유와 닮아 있었다. 나는 '고사리 스승'을 통해 급히 고사리를 구했다. 다행히 며칠 전 중산간 비밀 숲에서 꺾어 둔 생고사리를 구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비행기 반입이 가능하도록 정성껏 포장해 두고 이날 만을 기다렸다.


“신호등만 건너면 도착이야.”

고모의 전화를 받고 나는 출입구 앞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내 눈동자는 인파 속에서 그리운 얼굴들을 놓치지 않으려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내가 찾는 얼굴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왜 이리 늦으시지?'

그제야 나는 가방 속에 넣어 둔 핸드폰을 꺼냈다. 몇 분 사이에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찍혀 있었다.


나는 길이 엇갈릴 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확신 때문에 전화를 받지 못한 것이다. 그 사이 고모들은 일행과 함께 검색대를 지나 탑승구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순간, 울컥한 마음은 내겐 어째서 스치듯 만나는 것조차 이토록 어려운 일이냐고 되묻고 있었다.


그때, 손에 들려있는 고사리가 보였다. 고사리는 아홉 번을 꺾여도 열 번째에 다시 올라온다고 했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올라오는 것, 때가 된 찰나에 만나게 되는 것. 나는 정신을 붙잡고 고모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이미 검색대를 통과했던 큰고모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낮은 칸막이 건너편에 큰 고모가 보였다. 이제 여든이 된 큰고모는 예전의 곱던 얼굴과 다정한 표정 그대로 다가와 나를 힘껏 안아주었다. 우리 사이엔 낮은 칸막이가 있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잘 살아줘서 고맙다”

큰고모가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오래된 시간 속으로 성큼 들어갔다. 이런 따스한 온기를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아득한 기억이 되살아 났다.

고사리 스승의 고사리 그림바카라<봄이 들면>

나는 그제야 들고 있던 고사리 담긴 가방을 고모에게 건넸다. 내가 건넨 건 분명 고사리였지만, 사실 그것은 어린 시절의 나를 돌봐준 마음에 건넨 감사 인사였다.

제철이 되어야만 땅 위로 올라오는 고사리처럼, 우리의 만남도 긴 겨울과 장마를 지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고사리를 꺾다 보면 이상한 일이 생긴다. 눈앞의 것을 꺾고 나면 조금 전까지 그 뒤에 보이던 통통한 고사리가 어느새 눈앞에서 사라져 버리고 없다. 우리의 시간도 그와 비슷했다.

눈앞의 삶을 살아내느라 미처 돌보지 못한 인연들. 다시 보려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너무 멀어졌거나 아예 눈앞에서 자취를 감춘 뒤였다.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돌아서는 길, 내 마음은 다 채우지 못한 고사리 바구니처럼 허전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허전함 속에는 따뜻한 온기가 퍼져 있었다. 비어 있던 것이 아니라, 이제야 차오르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를 달래는 기록 #12]

오랜 세월을 거쳐 만난 혈육은 나에게 고사리 같은 존재였다. 긴 겨울과 장마를 견디고 가장 적절한 계절에 기어이 땅을 뚫고 올라와 “나는 여기 있어. “라고 말해주는, 살아 있는 증거 말이다.


내 고사리스승은 고사리를 잘 꺾을 뿐 아니라 잘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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